개요

위빠사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위(Vi)'라는 단어와 '빠사나(Passana)란 두 개의 단어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이다. 위(Vi)는 '모든 것', '다양한', '전부'란 뜻이고, 빠사나(Passana)는 '꿰뚫어 보다', '똑바로 알다'라는 뜻으로 '위빠사나'란 '모든 것을 이해하고 꿰뜷어 본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위빠사나는 세간의 진실한 모습을 본다. 혹은 분석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여기서 분석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편견(혹은 욕구)를 개입시키지 않고 현상을 현상 자체로 본다는 뜻이다. 여기서 분석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편견(혹은 욕구)을 개입시키지 않고 현상을 현상 자체로 본다는 뜻이다. 즉 어느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고요한 상태를 얻은 후에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 소멸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수행을 말한다. 이것은 붓다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수행법으로서 초기 불교부터 매우 중요시되어왔다. 현재에는 주로 실론, 버어마 등 소위 남방불교의 승려들과 재가 신자들에 의해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붓다의 수행법을 보존하고 발전시켜왔다는 그들의 자부심은 자못 대단하다. 한국과 일본 등 화두를 가지고 참선 수행을 주로 하는 대승불교 국가에서는 이것을 소승의 수행법이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붓다의 수행 방법을 소승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의 특성은 우선 현재적 성격에 있다. 예컨대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는 경우, 호흡이야말로 현재의 순간 순간에 명멸하고 있는 가장 현재적 사건이다. 이미 지나간 호흡이나 미래에 하게 될 호흡은 결코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호흡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바로 지금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정이 되는 것이다. 초기 불교에서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예컨대 자아나 유일신 같은 ) 대상에 대한 탐구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있다. 현존재가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을 벗기 위해 필요한 것은 괴로움의 원인이자 그 구조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의 대상은 반드시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관찰하여 일체의 사물이 무상하고, 무아이며, 따라서 괴로움이라는 것을 직관해내는 것이 이 수행의 핵심이다. 이때, 직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인지이다.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위빠사나의 대상은 몸, 감각, 마음, 생각의 대상 등 네가지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현재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현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붓다가 가르친 바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법의 장점은 우선 일상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언어 동작이 수행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현상에건 반드시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한다. 무슨 걱정거리가 생각나면 그 걱정거리에만 마음을 집중한다. 망상이 떠오르면 망상에 집중하고 기특한 생각이 나면 기특한 생각에 마음을 모은다. 좋은 것이든 궂은 것이든 영속하는 것은 없고 끊임없이 찰나마다 생성, 소멸하는 현상이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걷거나 눕거나 무엇을 잡거나 어떤 동작을 취하게 되면 그 동작의 극히 미세한 부분까지 자각할 수 있게 마음을 집중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일상생활을 깨어 있는 정신으로 영위하면서 할 수 있는 수행이 위빠사나이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영원한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에 간단없이 마음을 모아 삼매가 굳고 깊어지면, 더욱 미세한 생성과 소멸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응축력이 강화되어 일순간에 깨달음을 얻을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역사

현상 통찰하는 남방 수행법 불교는 깨침과 닦음의 종교이다. 2500년전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새벽별을 보고 이룬 부처님의 큰 깨침은 불교의 처음이요 끝이다. 그 깨친 바 진리를 풀어놓은 것이 불교의 모든 것이며, 그것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깨침에 돌아가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침의 종교인 불교는 단순한 이론이나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깨침을 향한 실천 즉, 닦음을 요청한다. 따라서 진정한 불교인은 쉼 없는 닦음을 통해 날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아니된다. 불교의 닦음은 어떠한 것일까? 불교의 닦음은 본질적으로 스스로 닦는 닦음이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의 실천과 노력을 통하여 깨침에 이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돌아가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너 자신을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아 열심히 정진하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당부도 이러한 불교적 실천, 닦음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이러한 불교적 닦음의 구체적 내용이 유명한 여덟 가지 바른 실천, 즉 팔정도이다. 일체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니르바나에 이르기 위하여 바른 견해,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정진, 바른 관철, 바른 선정의 여덟 가지 실천이 필요한다는 것이다. 이 여덟 가지 바른 실천이야말로 모든 불교적 실천의 원형이다. 마음 공부를 기본으로 하는 선 또한 그 연원을 이 가운데서 찾지 않으면 아니 된다. 팔정도 가운데서 특히 마음 닦는 선법의 기본이 되는 실천은 바른 관찰, 바른 선정 즉 정념과 정정의 두가지이다. 정정은 마음을 밝게 하여 비추어 보는 것이다. 즉, 지관이라고 할때는 정정,관은 정념을 가리킨다. 대승불교, 특히 중국에서 발달된 선 역시 그 뿌리를 정념과 정정의 실천에서 찾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한 근본불교의 실천이 발달, 변형된 것이기 때문이다. 위빠사나의 선의 성격 위빠사나 선은 어떠한 실천인가? 위빠사나란 관(觀)밝게 본다는 뜻으로 념(念,Sati)과 통하는 말이다. 따라서 위빠사나 선은 정념의 실천을 가르킨다. 정념은 우리 나라에서 팔정도의 다른 실천인 정사와 혼동되고 있지만, 행동하기 전의 사유를 가르키는 정사와는 전혀 다르다. 정념의 념, 즉 관은 마음이 밝게 비추어 봄을 말한다. 영어로는 mindful하다 aware한다는 상태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위빠사나의 봄은 순일한 그저 봄을 가리킨다고나 할까. 이 실천법은 부처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마음공부로 지금까지 남방불교의 여러 나라에 전승되고 있으며 근래에는 미국을 위시한 서양에도 보급되어 널리 실천되고 있다.

호흡

인도의 요가와 중국의 단전호흡에서는 호흡을 매우 중요시한다. 우파니샤드이래 인도의 모든 종교에서는 깨달음의 수단으로 요가를 주장하며, 석가모니가 수식볍을 했다는 것도, 요가명상을 한 것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숨인 프라나를 생명의 기운, 생명 그 자체, 우주의 근본 원리라고 보았다. 리그베다의 '푸루샤 구크타'라는 찬가에는 푸루샤의 숨으로부터 바람이 생겼다고 한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숨을 우주의 원리인 브라흐마와 아트만이라고 했다. 아티르바 베다에는 숨이 세상의 지배자, 여신이라며 찬양하는 시가 있다. 이렇게 호흡을 절대시하는 사상적 전통은 인도만이 아니라 인도와 접경한 중국의 도교에서도 마찬가지로서, 단전호흡을 하면 신선이 되어 영원히 죽지 않느다고 한다. 이렇게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은 다양한 수행 전통에 존재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수식관 혹은 아나빠나사띠 그 자체에서 얻은 선정력 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판단, 세상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를 최초로 시도하셨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지혜를 기르는 위빠사나 수행에는 사마타의 선정력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아주 특이하게 호흡수행 즉 선정수행 없이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결국 불교 수행은 계행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호흡수행 등 사마타 수행으로 선정을 닦은 후, 그 선정력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나와 세상에 대한 무명과 갈애를 타파하여 번뇌를 소멸화고 열반에 이르는 지혜를 기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즉 불교수행에서 호흡이란 지혜의 기반이 되는 선정을 기르기 위한 선정수행의 대상이 된다. 다른 종교에도 호흡수행은 존재한다. 하지만 불교의 호흡수행을 통한 선정과 다른 종교의 호흡수행을 통한 선정은 다르다. 다른 종교의 호흡수행은 수행을 통한 고요함과 선정에 끝난다. 반면에 불교의 호흡수행은 수행을 통해 얻은 고요함과 선정력이 갈애와 무명을 타자하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지혜로 전환되는 위빠사나 수행과 연결되는 정견의 매커니즘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전체 수행 매커니즘은 철저하게 불교의 정견에 기반을 두고 행애진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바른 삼매(정견을 바탕에 둔 삼매)와 삿된 삼매(정견을 바탕으로 두지 않은 삼매)로 호흡수행이나 기타 사마타 수행을 통한 삼매를 구분한다.

수행 방법

위빠사나는 크게 두가지 수행법이 있는데, 좌선과 경행(행선)이다.

  • 좌선은 가부좌 상태로 앉아서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다. 즉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수행인데 일어남(숨을 들이쉬어 배가 나올 때)과 사라짐(숨을 내뱉어 배가 들어갈 때)르 관찰한다.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온갖 잡념이 생기고 쑤셔 오는 부위에 집중한다. 잡념이나 아픔의 대상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아픔이나 잡념이 사라진다. 이렇게 1시간 정도 좌선을 하고 다시 1시간 정도 경행(행선)을 반복한다.
  • 경행은 좌선으로 굳어지거나 뭉쳐진 근육을 풀어 주는 수행법으로, 발바닥에 집중하는 것이다. 편하게 서서 손은 앞으로 모으거나 편하게 뒷짐을 진다. 전방을 보며 천천히 걸어가면서 발바닥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발을 들 때, '듦, 나아감, 놓음' 세 단계에 집중하면서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의의

위빠사나란 무엇인가. 다소 생소한 느낌을 주는 이 명칭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이다. 많은 한국인 수행자들이 미얀마 등 남방의 불교 국가에 건너가 이것을 배워 왔고, 자신들의 수행 체험을 주변에 알리는 가운데 위빠사나라는 명칭을 각인시켰다. 이 명상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제반 현상을 그때그때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초기 경전에 나타나는 사념처 수행을 실제적인 내용으로 한다. 동북아시아의 대승불교권에서는 이 방법이 간화선이라는 독자적인 수행법에 가려져 잠시 망각되었다. 그러나 남아시아의 상좌부 불교권에서는 이것을 붓다가 직접 개발하고 유포한 명상으로 믿으며 계승해 오고 있다. 대승불교의 영향 아래에 있는 한국에서 위빠사나는 이질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불교 이래의 전통적인 명상 기법을 가리킨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위빠사나로 대변되는 붓다의 가르침은 오로지 있는 그대로만을 관찰, 자각케 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제반 현상을 사실대로 수용하고 통찰하게 되며 종국에 이르러서는 그것의 참된 모습을 깨닫게 된다. 궁극의 목표로 제시되는 열반의 경지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