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Enjoyment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월 19일 (화) 16:18 판 (개요)


==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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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한국 말에는 이런 말이 있다. 모든 한국인들이 정말 많이 듣고 자란 말이 아닐까 싶다 마음 먹기는 그만큼 중요하다 마음을 어떻게 먹었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라면 아주 잘 안다고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마음은 왜 다스려야 할까?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왜 안되는 걸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 이기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거나 걱정을 끼치는 것은 굉장히 싫어하고 나로 인해 나의 가족이 내가 아는 사람이 욕 먹는 건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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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 심리학과 김경일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한국 사람들은 너무나 사회적인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과 관련있는 사람을 뒷담화하는 것도 싫어하는 이상한 성격(?)을 가졌다.

이렇듯 사회적인 관계가 아주 밀접하게 엮여 있는 한국 사회에서 마음이 불편하면 정말 끔찍하게도 힘이 들거다 그런 한국 사회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화를 버럭 낸다거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질투하는 걸 들키거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후회할 일을 만드는 것을 사람들은 이불킥하며 후회한다. 몇날 몇일은 이불킥을 하며 곱씹게 되는 자신을 만들기는 누구나 싫어할거다.

그렇다 지금까지 얘기 했듯이 마음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감정적인 반응이 있는데 이성적 판단이 감정적 반응을 컨트롤 할 수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안 생기지만 감정적인 반응이 이성적 판단을 앞서 버릴 때 우리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법(팁)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나의 이성적 판단이 감정적 반응을 컨트롤 할 수 있을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뭐 그럴 수도 있지하는 것을 어떤 사람은 참을 수 없어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마음의 크기 차이가 아닐까?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마음이 커야 세상 사는데 편하다는 것 또한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마음의 크기는 어떻게 넓히며 그 주관적인 감정을 더 튼튼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일까?

과거를 반추(되새김)하지 않기

원하지 않을 때도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런 때에는 과거의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마음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보라. 직관과 어긋나는 사고처럼 보이고 과거를 반추하는 현상을 악화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본 뒤에 당신이 이를 해결할 수 있는지 고려해보면 대부분 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어 불안감을 줄일 수 있게 된다.
  • 걱정할 시간을 따로 내어본다. 자기 문제에 대해 걱정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한다. 걱정이 들면 나중에 생각할 시간이 있으니 지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원치 않을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
  • 산책을 해보는 것도 좋다. 밖에 나가서 걷는 것은 단순하지만 걱정을 더는 방법이기도 하다. 운동을 하면서 호흡을 하기도 하지만 뇌가 새로운 정보(시선, 소리, 냄새)를 받아들이게 되어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걱정을 하지 않게 된다.

가만히 바라보기

마음 상태를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다음 내용은 혜민 스님이 지은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쌤앤파커스 출판 ) 에서 발췌하여 부분 수정한 것이다.

* 그저 바라보는 연습 (188쪽 ~ 195쪽) 

내가 마음을 붙잡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 마음은 자기가 알아서 저절로 변한다. 마당에 있는 나무를 보듯, 강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 내 것이라는 생각이나 집착 없이 그냥 툭, 놓고 그 느낌을 그저 바라본다. 예를 들어 '마음이 울적하다'는 말 뒤에 숨은 언어 이전의 느낌 자체를 2,3분만 숨죽여가며 조용히 관찰하다 보면 미묘하게 그 감정이 계속 변해가는 것이 보인다. 그 울적한 느낌은 '내가 만들어야지 ~.' 하며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 잠시 일어난 느낌이었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 또 자기가 알아서 소멸한다. 여기에다 내 스스로가 자꾸 '울적하다, 울적하다.'라고 자꾸 말을 하면서 붙잡게 되면 감정이 변해가는 상태에서도 자꾸 울적한 마음으로 되돌아가 그 느낌만 자꾸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그 말과 그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그 느낌이 올라왔음을 알아채고 그냥 고요히 변하는 모습을 관찰한다.

우리 마음이 세상을 향할 때는 세상사에 쉽게 휩쓸려버리지만, 그 마음이 내면을 향해 있으면 아무리 세상이 소란스럽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고 평안을 찾을 수 있다. 마음을 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마음을 비워여지...'하고 마음먹고 마음을 비우려 하면 오히려 더 마음이 혼란스러워진다. 왜냐하면 '비워야지...' 하는 것도 사실은 비워야 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을 쉬어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 정답은, 올라오는 그 생각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된다. 지켜보는 순간, 생각은 쉬고 있다.

사람들의 의식은 보통 외부로 향해 있다. 그래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혹은 밖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주로 이야기한다. 반대로 수행자는 그 의식을 마음 안으로 돌려서 평생 남 이야기를 하던 버릇을 고쳐 내 마음의 모습을 보고, 그 마음을 알아채려 한다. 우리 안에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용히 바라보는 자가 있다. 밖의 일은 수시로 변해도 '바라보는 자'의 의식은 그 일에 상관없이 그저 온전히 현재에 있다. 삶의 고통의 원인은, 내 안의 '바라보는 자'를 잊고 외부의 사건과 대상에 마음을 빼앗긴 채 따라가기 때문이다. 덜 생각하며 살고 싶다면, 사실 아주 간단하다. 마음을 현재에 두면 된다. 생각이나 걱정은 모두 과거나 미래의 영역에 속해 있다. 마음을 현재로 가져오면 생각은 쉬게 된다. 마음 속에 올라오는 감정을 생각으로 붙잡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그 감정들이 변하면서 소멸한다. 내가 말을 붙여서 생각으로 붙잡지만 않으면 마음 속에 올라온 불편한 감정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알아서 나를 그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괴로우면 그것을 붙잡고 있으면서 자꾸 '괴롭다, 괴롭다.' 남들에게 이야기라며 되새기지 말자.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으면 그 괴로움을 직시하자. 그 녀석의 정체를 보고 있으면 그 모양이 자꾸 변한다. 괴로움, 그 녀석도 그래서 허망한 것이다. 전에 없었던 것이 지금 생겨났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다시 전부 사라진다. 경전의 말씀을 듣고 깊은 영혼의 울림이 오더라도,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내 앞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은 사실 다 마음의 장난이다. 수행자가 찾는 것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을 찾는 것이지 없었는데 새로 생겨난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 내 마음과 친해지기 (201쪽 ~ 205쪽)

많은 사람들은 화가 나거나 짜증, 서운함, 미움 등의 감정들이 밀려올 때 그 마음을 내가 다스려야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그 마음을 이해가 필요한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불편한 감정이 내 마음속에 생겼을 때, 그 감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하지, 그 부정적인 마음의 상태를 이해하거나 그 마음과 친해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사람들은 '마인드 컨트롤' 혹은 '마음 다스리기'와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하면서도 '마음 알아가기' 혹은 '마음과 친해지기'와 같은 표현은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밀려오는 화, 짜증, 불안, 미움의 감정을 바꾸려고 노력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분노, 미움 같은 부정적인 마음 상태가 '진흙'이라고 한다면, 마음이라는 물속에 진흙이 잔뜩 풀어져 온통 진흙탕이 됐는데, 어떻게 하면 그 진흙을 빨리 가라앉힐 수 있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빨리 진흙을 가라앉히려고, 즉 부정적인 마음을 가라앉혀 평심을 유지하려고, 마음의 물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진흙들을 아래로 아래로 눌러 가라앉혀보자. 결과는 어떤가? 오히려 손의 움직임 때문에 물속의 진흙은 더 어지럽게 흩어지지 않는가? 예를 들어, 누구를 심하게 질투하여 미워하는 마음이 올라왔을 때, 그 마음을 없애고 싶어 다른 좋은 생각을 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 미워하는 마음이 다시 비집고 올라오지 않는가? 이러니, 내가 부정적인 마음 상태를 바꿔보겠다고 마음 속으로 들어가 뭔가를 하려고 하면,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 부정적인 마음 상태만 한번 더 헤집어놓는 결과만을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내 스스로가 진흙탕과도 같은 부정적인 마음을 이해하고 또 그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사실 답은 간단하다. 그 올라온 마음을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듯 제삼자의 입장에서 한발짝 떨어져서 조용히 관조하면 된다. 우리가 보통 잘 모르는 대상을 이해하려고 할 때, 기존에 알았던 생각들을 내려놓고 조용히 그 대상을 관찰하면 되지 않던가? 즉, 진흙탕과도 같은 마음 그릇 안으로 내가 들어가서 어떻게 해보려는 게 아니고, 마음 그릇에서 나와 침묵으로 그 감정들을 영화나 드라마 보듯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관조하는 자가 화, 짜증, 불안, 질투와 같은 말에 집착하지 않고 그 말이 지칭하고 있는 화의 에너지, 짜증의 에너지, 불안의 에너지를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다. 마치 거울이 어떤 것은 비추고 어떤 것은 비추지 않는 식의 선택을 하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그저 물끄러미 올라온 감정의 에너지를 선택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다. 거울이 자기가 비추는 대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분별하거나 말을 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관조자의 입장에서, 내 마음을 바라보면, 나의 의식이 약간 뒤로 물러나는 듯한 느낌, 머리 뒤에서 내 마음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불편한 마음 상태가 자기 스스로 천천히 다른 형태로 변하면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내가 그 감정들을 마음 그릇 안에 들어가서 직접 변화시켜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그릇 밖에서 조용히 관조 하고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저절로 감정 에너지의 형태가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불편한 감정을 마음 그릇 안에 들어가 직접 다스리려 하면 오히려 그 감정들을 더 헤집는 결과만 낳는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렇게 자꾸 지켜보면 뭐가 좋나요?", "현실 회피 아닌가요?" 아니다. 오히려 이 과정은 현실 회피가 아닌 현실 직시이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현실 직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내 마음의 상황을 직시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마음이라는 허공과 같은 공간에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잠시 일어났다 나의 의도와는 또 상관없이 사라지는 구름과 같다는 것을. 이 깨달음이 있고 나면 화, 짜증, 불안, 미움의 감정이 일어나도 크게 끄달리지 않게 된다. 그것들을 내 것이라고 붙잡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내 마음 공간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구름과도 같은 손님이기에. 마음을 다스리려 하지 말라. 그저 그 마음과 친해져서 그 마음을 조용히 지켜봐라.

적극적으로 욕망을 추구하기

원인이 되는 욕망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욕망의 실현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법이다. 이 또한 마음을 다스리는 하나의 길이 될 수가 있다. 물론 사회 통념상 허용되는 범위에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하는 것이다.

마음빼기 방법

'마음'알면 비울 수 있다. '마음빼기' 명상 방법을 소개한다.

마음이란 무엇일까?
내 마음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어떻게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

마음수련의 '마음빼기' 방법은 단순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다른 명상과는 달리 쌓아온 마음을 완전히 버려 나의 본래마음(우주마음)이 되어 살게 된다. 그래서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가능하다. 그 원리와 마음빼기 내용은 아래 링크에 들어가보면 알기 쉽게 그림과 함께 알려주고 있다.

상황별

1) 아이에게 화가 날 때

1. 법륜 스님의 처방

질문자 - 분노 조절이 안 되고 쉽게 짜증을 내는 엄마이다. 첫 아이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그 기대치에 못 미치면 닦달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한다. 부족한 점에 대해 많이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음을 이렇게 내려놓고 아이를 믿어 주고 좀 따뜻한 엄마가 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답변자 (법륜 스님) -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사는 것이다. 농담을 하는 게 아니고 안 되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질문자 - 그런 저의 양육 태도에 대해서 아이가 소심해 하고 무언가 시도할 때 실수할까 두려워하고 포기하는 모습을 보면....

답변자 -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엄마가 성질을 내면 애가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내가 안 고쳐지면 아이가 좀 더 나빠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아이를 위한다면 내가 개선을 하던지.. 엄마가 좋은 사람이 아닌데 애가 어떻게 좋은 애가 되겠는가. 그것은 욕심이다. 뜨거운 어떤 것을 내가 갖고 싶으면 손을 데어서라도 쥐고 있거나 그것이 싫으면 놓는 것이다. 인생에 달리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 성질대로 화내고 짜증내고 하는 것이 조절이 안 되면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안 되는 것을 고치려고 하니 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가. 내 성질이 그러하니 그 범위 안에서 봐 주라. 그리고 아이도 그 범위 안에서 크게 하는 수 밖에 없다. 남을 인정하듯이 나를 인정해 줘야 한다. 그래야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예를 들어 노래를 못 하면 노래를 잘 하려고 노력하며 스트레스 받는 대신 못 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산다. 내 성질이 더러운데 성인군자가 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면 내 성질이 이렇구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남에게 존경 받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사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인정하고 수용하고 사는 길 밖에 없겠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아이는 그 범위 안에서 엄마를 본받으며 자라니까 그 정도 키워질 것이다. 그런데 내가 부모된 자로서 내가 손해 보는 것은 괜찮은데 내 아이에게 해가 가해지는 것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자. 내가 아무리 성질이 안 좋아도 목숨을 걸고 고쳐야지. 내가 짜증내고 화내는 것이 내 아이의 장래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주는지 알면 고친다.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잘 모를 뿐이다.

담배 피는 사람은 끊는다, 끊는다 하면서 못 고친다. 그러나 담배를 한 번 피면 열흘 동안 숨도 못 쉬고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심하게 아팠다고 치자. 분명히 담배를 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벌을 주면 된다. 그런데 보통 자기 자신을 그렇게 징벌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화를 한 번 낼 때마다 전기 충격기를 사서 자신을 지져 버리면 ( 관객들 폭소 ) 고쳐질까 안 고쳐질까? 고쳐진다. 내가 그만큼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다는 말이다. ( 중략 ) 정말 자식을 사랑한다면, 엄마로서 자식에게 나쁜 영향은 안 주겠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각오하면 된다. 담배 피는 사람에게 폐에 붙은 니코틴 사진을 컬러로 보여 주면 절반은 담배를 끊는다. 그런 것처럼 자기가 성질낸 게 아이에게 영향을 미쳐 어떻게 나빠지는지 5년 후, 10년 후, 15년 후 일어날 일을 비디오처럼 보여 준다면 고칠 것이다.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 704회 내용의 일부를 옮겼습니다.

참고 영상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 불안을 다스리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