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마음이 더 여유로워졌다, 들끓던 잡생각이 끊겼다, 직장 스트레스가 없어졌다, 대인관계가 편안해졌다, 나를 알게 됐다, 불면증이 해결됐다, 아이들 남편과 마주 보고 웃는 날이 많아졌다… 그분들이 느끼고 있는 효과는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나를 돌아보고 마음을 비우는 시간을 갖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차츰차츰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명상이 있습니다만, 마음수련은 오직 마음에만 집중한 마음 전문 명상입니다. 일주일만 경험해도 참가자들에게 많은 효과를 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족,부부관계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결혼 30년 차 신혼부부정기언(수원여대 총장), 서희순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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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30여 년, 하지만 이들 부부는 아직 신혼이라 말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며 집안일, 자녀 얘기, 하루 일상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부부. 아내는 “30년 넘게 결혼생활을 하면서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교육행정가로서, 대통령 교육비서관과 교육부 차관보를 지낸 남편은 공무원들 사이에 ‘온화한 카리스마’로 잘 알려져 있다. 업무에서는 늘 대화와 설득으로 합리적인 조정을 해온 것, 하지만 가정에서는 ‘카리스마’에 더 비중이 실렸던가, 금슬 좋은 이 부부에게도 마음의 간격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정총장이 마음수련을 하면서 그 간격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 평생 처음으로 “미안하다, 고맙다” 말한 남편 -

“조선시대 갓 쓰고 팔자걸음 하던 양반이 21세기에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은 사람이었어요. 아주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었죠. 농담이나 실없는 소리를 해 본 적이 없어요. 빈틈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죠.” 부부간의 대화 시작하는 모습(핸드폰) 아내 서씨는 그런 남편이 참 어려웠다.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거나 주사를 부리는 일도 없고, 실수하는 일도 없었다.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남편의 모습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남편으로서는 서운한 점이 많았다. 결혼한 이후 줄곧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직장생활 하랴, 살림하랴, 집안일이며, 아이들 문제며, 남편과 의논하고 싶고, 때로는 하소연하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말을 끊어버렸다.

“뭐 어떻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얘기 좀 들어달라고 한 건데, 결론도 없는 말을 해서 뭐 하냐, 시어머니한테 불만이 있으면 직접 얘기해라, 이런 식이었어요.” 그렇게 번번이 면박을 당한 후로 아내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점점 대화가 단절되어갔다. 함께 직장생활을 하니 서로 얼굴 마주보며 대화를 나눌 시간도 거의 없었지만 시간보다는 할말이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그랬던 부부가 요즘은 시시콜콜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 정기언씨가 마음수련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2002년인가, 여름휴가 때 남편이 일주일간 수련을 하고 와서는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고, 고맙다고 말하는 거예요. 평생 처음 그런 말을 들었죠. 감동스러웠어요.” 옆에서 미소 지으며 듣고 있던 정기언씨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그 말만 했나, 사랑한다고도 했지.”

아내는 “신혼 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다 늙어서 넘치도록 듣는다”며 웃는다. 정기언씨는 “자라오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잠재의식 속에 단단한 고정관념이 되어 자신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음수련을 하면서 알게 됐다”고 한다.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엄격한 집안이었어요. 어려서부터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죠.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 우선이었고, 아들이 우선이었어요. 제가 자라서는 아들도 어려워하실 정도였어요. 여자라면 남자가 하는 일에 순종해야 되고, 시부모 모시고 살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집안일은 전부 아내의 몫이라는 사실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도, 잘못됐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죠.”

- 고정관념과 생각 버리니 상대 입장 보여 -

그 모든 고정관념과 생각들을 다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아내 입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만 옳은 줄 알고 자신의 생각과 입장만 강요하면서 아내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절절히 깨달아지면서 진심으로 참회가 됐다. “똑같이 직장생활 하면서, 나는 집에 오면 꼼짝도 안 하는데 아내 혼자 온갖 집안일을 다 해온 거죠. 남편이라는 사람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힘들다 말하면 면박만 주고, 가장 가깝다는 배우자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게 했으니, 몸도 약한 사람이 의지할 데도 없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까 너무 잘못했고 미안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시키기만 하던 그가 요즘은 설거지, 청소는 기본이다. 항상 근엄하게 굳어 있던 얼굴도 ‘못난이 인형’처럼 웃는 얼굴로 변했다. 그가 이렇게 변한 것을 누구보다 좋아한 건 아이들이었다. 엄하고 무섭기만 하던 아빠가 농담하고 장난치는 모습에 아이들이 너무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사실 아내나 아이들이 원한 건 이야기 들어주는 거, 따뜻한 말 한마디, 손 한번 잡아주는, 아주 사소한 것들인데 전에는 그걸 몰랐어요. 그저 내가 바르게 성실하게 살고 열심히 일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지위가 올라가면 가족들에게 다한 거 아니냐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던 거죠.”

마음수련으로 잃었던 가족을 되찾았다는 정기언씨. 집안의 가장으로 항상 군림하려 했고, 자기 입장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만 가족들에게 요구했던 그였지만 요즘은 저절로 아내나 아이들이 뭐가 필요할까, 도와줄 게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단다. 고정관념이나 의무감, 체면, 격식 따위를 다 버리고 나니 가족관계뿐만 아니라 직장생활도 편해지고 몸이 날듯이 가벼워졌다는 정기언씨는 아내에게도 마음수련을 권했다.

“사실은 남편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게 옛날부터 있었거든요. 그래서 남편이 권하는 건 하기 싫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마음수련하고 완전히 변했잖아요. 저 사람이 이 정도로 변했다면 마음수련에 뭔가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죠.” 서희순씨는 시간을 쪼개어 마음수련 교원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수련을 하고 보니까 항상 남편에게만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입장만 고수한다고 했는데, 나도 마찬가지였더라구요. 나도 내 입장에서만 판단하고 분별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런 나를 버리니 남편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됐고 누구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마음수련 안 했으면 ‘황혼 이혼’ 당했을 것 “전에는 피곤한 몸으로 퇴근하면 집안 분위기가 냉랭했어요. 아이들은 거실에 있다가도 내가 오면 인사만 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려요. 옆에 있는 아내도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있는 것 같고…. 막연히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가 잘못됐는지 몰랐었죠. 내 잘못인 줄도 모르고 가족들한테 화를 내곤 했어요. 나중에 아내가 하는 말이 나에 대해서는 완전히 포기하고 애들만 보고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대로 갔으면 아마 황혼 이혼 당했을지도 모릅니다.”(웃음) 그런 남편을 보며 서희순씨는 웃으며 말한다.

“이혼까지는 아니더라도 굉장히 삭막한 생활을 이어갔겠죠. 지금도 바쁜 것도 그대로 바쁘고 서로 시간이 없기는 마찬가지죠. 그렇지만 마음이 달라지니까, 저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나를 정말 생각해주는구나 그런 믿음이 생기니까 삶 자체가 완전히 바뀐 거예요. 저희 부부에게는 마음수련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셈입니다.” 마음수련 후 비로소 부부 사이에 삶의 동반자, 평생 반려자로서 진정한 신뢰를 갖게 됐다는 정기언씨는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부부에게 ‘언더스탠딩(understanding)’이라는 말의 의미를 짚어주고 싶다고 한다.

“이해한다는 단어를 보면 아래에[under] 선다[standing]는 뜻이잖아요. 상대보다 아래에 서는 낮은 마음이 되어야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가부장적인 위계의식을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아내를 이해할 수 있었죠. 낮은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를 다 버려야만 합니다.” 나를 버리고 낮은 마음이 되어야 감사와 행복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는 두 사람. 곁에 있어줘서 너무 감사하다며 손을 맞잡고 웃는 중년의 부부, 신혼처럼 달달하다.

(정 기 언 님은 1954년 전남 진도 출생으로 서울중앙고와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미국 아이오와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교육행정 전공)를 받았다. 제19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한 뒤 교육부 국제교육협력관과 서울대 사무국장을 지냈다. 대통령 교육비서관에 이어 교육인적자원부 차관보, 서울특별시 부교육감을 역임했으며 2006년 7월부터 동신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수원여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EBS교육방송 이사와 전인교육학회 부회장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서 희 순 님은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전여고와 성균관대를 졸업, 서울시립대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교사, 교감직을 역임하며 교직원으로서 재직 중이다. 1983년 정기언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교원 연수 프로그램으로 마음수련을 경험하기도 했다.)

행복,삶의의미

스트레스

마음수련원 에서 찾은, 트라우마 극복하는 비법! (장학수 / 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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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수 소방관. 그가 하는 일은 화재, 교통사고, 산악 사고 등 각종 위급 상황이 발생할 때 출동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직업의 특성상 참혹한 사고 현장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겪는 이른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통받아야만 했다. 마음 빼기를 하며 비로소 그 기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장학수(46) 소방관. “이제 그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각종 사고 현장에서 보게 되는 처참한 광경이에요. 제가 처음 죽음을 접했던 건 교통사고 현장이었죠. 중년 여성의 운구를 이송했었는데 뇌리에 오랫동안 남더라고요. 2005년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따고 본격적으로 응급구조 업무를 하면서 상황은 더했어요. 추락사, 자살, 교통사고 등 각종 사건 사고들을 접하다 보니 어느새 장면 장면이 진하게 각인이 되더라고요. 일하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고 꿈에도 나타나고 가위눌림도 당하고….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과 유사한 현장에 갔을 경우엔 그때 기억이 다시 떠오르니까 참 많이 괴로웠죠. ‘제발 이런 걸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굴뚝같았어요. 정말 이직을 하고 싶을 정도였죠.

그 무렵 우연히 마음수련에 대해 알게 됐어요. ‘진짜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이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거기서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그 방법을 간절히 찾던 중이라 바로 논산 메인센터에 갔습니다.

처음엔 기억을 떠올려 버린다는 게 힘들데요. 특히 죽음과 관련된 사진을 버릴 때는 그 감정 속에 빠져서 허우적대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어디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면서 오기 반 간절함 반으로 버려나가 봤어요. 신기한 건 수련한 지 3일이 지났을 뿐인데, 머리만 대면 바로 잠이 든다는 거예요. 수면 장애가 있어서 잠 한번 자려면 한 시간 이상을 뒤척이면서 실랑이를 벌여야 했거든요. 자다가도 3~4번씩 깨니까 늘 피곤했는데, 잠을 푹 자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제가 바뀌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우선 출동에 대한 두려움들이 조금씩 사라지더라고요.

무엇보다 좋았던 건 나를 괴롭혔던 그 참담한 기억들의 끄달림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늘 회피하고 싶었던 현장에서 사건 사고를 담담하게 처리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놀라기도 하고요. 그렇게 마음의 평온을 찾으니까 하루에 10건 이상씩 사고 처리를 해도 피곤한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그때 진정한 휴식은 마음에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소방관, 경찰관 등은 다른 직종에 비해 외상 후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밝아 보여도 눌러놓고 지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이런 직종의 분들은 특히 마음수련을 했으면 좋겠어요. 집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듯이, 우리의 마음도 한 번쯤 싹 리모델링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힘든 마음들 털어내고, 무거운 기억들을 빼내고 나면 새롭게 편안하게 살 수 있으니까요. 요즘은 출동벨이 울리면 그냥 몸이 뛰어나가지, 어떤 번뇌도 생각도 없어요. “가자! 빨리 가자!” 하고, 오직 내가 필요한 그곳을 향해 힘차게 출동할 뿐입니다.


잘나갔던 프로댄서의 선택 (이항우 / 안산시 상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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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이, 김완선, 민해경, 김건모, 신승훈, 이승철, 현진영… 한때 TV를 통해 매일 볼 수 있었던 인기 가수들, 난 그들 뒤에서 춤을 췄었다. 나는 잘나가는 댄서였고 우리나라 최정상의 댄스 팀을 꾸리고 있었다. 댄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은 다 나를 찾아올 정도였고, 하루 두세 개씩 방송을 소화하느라 바쁜 날들을 보냈다.

- 나를 인정받게 해준 춤 -

춤을 처음 시작한 것은 대학교 축제에서였다. 댄스 참가 모집 포스터를 보고 친구와 찾아간 동아리. 사람 앞에 나서기를 힘들어하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던 내가 춤을 추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처음 출 때는 서툴렀지만 동작이 익숙해질수록 점점 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 당시에는 AFKN이라는 미군방송이 있었다. 거기서 방영하는 쇼 프로그램의 춤을 따라하고 뮤지컬영화 ‘Grease’를 극장 뒤에서 보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따라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그랬나, 주변 친구들이 잘 춘다 잘 춘다 하니 진짜 잘 추게 됐다. 학교 모임이나 축제 때만 되면 어김없이 나의 댄스에 환호와 박수를 보내줬다. 처음으로 뭔가를 잘한다 남에게 인정받자, 남을 즐겁게 해주는 춤의 매력에 더욱 빠졌다.

1980년대는 전 세계가 디스코 열풍에 휩싸여 있던 시절, 우리나라 클럽 여기저기서 디스코 경연대회 붐이 일어났다. 일급호텔과 클럽에서 상금과 상품을 걸고 대회를 개최했고 나가기만 하면 일등은 내 차지였다. 그때 시절 상금이 30만 원 정도면 평사원 봉급 정도이던 시절, 컬러TV, 오디오세트 등 가전제품도 상품으로 받아왔다. 그러던 중 인순이씨 매니저로부터 남자 댄서를 구하는데 해볼 의향이 없냐는 제의가 들어왔고, 그것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본격적인 남자 프로댄서의 시작이 되었다.

- 나를 돌아보게 해준 춤 -

김완선씨도 ‘인순이와 리듬터치’에서 연습생(?) 생활을 할 때 만나, 그녀의 데뷔곡 ‘오늘밤’ ‘리듬 속의 그 춤을’ 안무와 백업을 했다. 이후부터는 여러 가수들의 안무 요청이 쇄도했다. 민해경, 김건모, 신승훈, 이승철 등 KBS ‘젊음의 행진’ 전속 안무도 맡아서 하고 댄스 팀도 50명 정도로 인원이 늘어났다.

춤이 좋아서 하는 일이었지만, 당시 댄스 팀의 환경은 아주 열악했다. 방송 말고 밤업소 활동이나 이벤트 활동 후에는 돈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았다. 댄스 팀원들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해 항상 힘들었다. 댄스에 대한 열정으로 버텼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경쟁하는 댄스 팀도 많아지고, 팀 유지가 힘들어서 10년 넘게 활동하던 댄스계를 떠나게 됐다. 이후 자영업을 하면서 돈도 꽤 모았지만 댄스계 후배들을 만나면 내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 허함을 달래기 위해 술을 자주 마셨고 몸이 점점 축나기 시작했다. 몸 마음이 지쳐 있을 때 조카가 ‘삼촌, 피곤해 보여 좀 쉬다가 와’ 하며 마음수련을 권유했다.

쉬다 올 요량으로 옷가지 몇 개 챙겨서 찾아간 논산 메인센터. 앉아서 명상을 하라는데 내심 ‘어!! 잘못 왔구나’ 싶었다. 난 쉬러 왔는데 눈을 감고 자기를 돌아보란다. 하루가 지나고 ‘그래, 이왕 온 길에 시키는 대로 해보자’ 마음을 바꿔 먹고 시키는 대로, 영화 한편 같은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3일째, 4일째… 나를 돌아보는데… 정말 놀랬다.

- 진짜 행복을 찾게 해준 춤 -

마음을 버리자 나 중심적인 입장에 빠져 있을 땐 잘 몰랐던 내 모습이 정확하게 보인 것이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무시하고 멸시하고, 댄스의 트랜드는 바뀌고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나만 옳다고 고집했던 나. 내가 왜 망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만큼 이기적이고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내 실체를 알고 나니 너무 버리고 싶었다. 마음수련을 하며 한 겹 한 겹 양파 같은 가짜마음들을 빼기하니 나를 옭아매고 붙들고 있던 가짜마음에서 벗어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여행도 많이 다녀봤지만 그때뿐이었다면, 휴식 같은 진짜 휴식을 하게 되어 너무 감사했다. 마음빼기를 하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 수련 전에 먹던 스트레스성 알러지 약을 안 먹어도 될 정도로 좋아졌다.

주말이면 논산메인센터로 전국에서 수백 명이 넘는 분들이 명상을 하러 온다. 나는 그분들에게 자원봉사로 춤을 가르치면서 춤이 서로와 서로의 소통이라는 걸 알게 됐다. 예전에는 나 혼자 인정받고 잘나고 싶은 마음에서 춤을 췄지만 지금은 잘 춘다 못 춘다는 마음이 없이 함께 하나 되서 춤을 추면 즐거움이 극에 달한다. 마음수련을 하면서 천국과 지옥도 내가 만드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가짜마음인 내 마음속에 살면 지옥이고, 진짜마음인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면 천국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진리,깨달음

마음 없이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 (오세천 /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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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보면 무섭다....."

초등학교 때였다. 육이오 전쟁 중이었지만 소를 몰고 온 들판을 다니며 풀을 먹이고 들어오는 나에게 ,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이후에도 어머니는 종종 '내가 너를 보면 덜컥 겁이 난다'고 하셨다 어린아이가 그 힘든 농사일을 너무 악착같이 하니, 놀랍고 기특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아니 뱃속에 있을 때 지우려고 약까지 먹었는데, 끈질긴 생명력으로 태어난 아이가 누구도 안 하려 하는 힘든 일들을 하니, 안쓰럽고 미안해서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

9남매 중에 일곱 번째로 태어났기에, "내가 너를 지우려고 약을 먹었었다'는 말씀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흘려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잠재의식 깊이에는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게 자리 잡혀서였을까. 생존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커서였을까.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아니 열심히 살아졌다.

삶의 의미 - 내가 사는 것인가, 저절로 살아지는 것인가 -

우리 집은 집터만 400평이 넘는, 여러 소작농까지 둔 부유한 농가였다. 해방 후 바로 내가 8세 때 사회주의가 들어오면서 토지개혁이 일어나 소작농지를 다 분배해야 했지만 우리가 직접 짓는 땅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에 일본 메이지대에서 유학을 할 정도로 식자였던 아버지, 부유한 농가에서 귀하게 자란 형과 누나들은 농사일을 힘들어했다. 그 많은 일들을 힘들다는 생각도 없이 한 것은 나였다. 아직 어리니 일을 안 한들 뭐라 할 사람도 없었건만,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이 저절로 눈이 떠지고 몸이 움직여졌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2~3분 거리에 있는 교회에 가서 종을 치고, 들에 나가 일을 하다가 학교에 가고, 학교에 다녀와서 또 일을 했다. 부지런히 열심히 사는 것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내가 손대는 일은 이상하게 다 잘되고, 내가 하는 농사는 언제나 남들보다 몇 배의 수확을 거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육이오 사변으로 마을에 폭탄이 많이 떨어져 마을 곳곳이 폐허가 되고 고철들이 생겼다. 그게 돈이 될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나는 고철이 보이면 새끼줄로 묶어 집으로 끌고 와서 마당 한쪽에 쌓아놓았다.그것이 중학교 1학년 때의 일, 이후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에는 가격이 많이 올라서 큰 도움이 됐었다.중학교 2학년 때는 당시 특수농작물이었던 담배농사를 지어 고수익을 냈고, 담배농사 이후에는 고구마농사로 전환하여 또 많은 수익을 올렸다. 건강하고 힘이 좋아서 그 무거운 고구마 자루를 혼자 거뜬히 수레에 옮겨 싣고 나가 가게에 팔기도 했다. 중학생이 뭘 알아서 그랬겠는가. 이렇게 하면 돈을 벌 거야 하는, 어떤 계산도 없이 그저 열심히 움직이고 나면 그것이 필요한 등록금이 되고 생활비가 된 것이다.

원하던 대학의 토목학과에도 무난히 들어가고, 그 어렵다는 기술사 시험에도 한번에 합격했다. 이후 건설공무원을 하면서 우수공무원으로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나이 서른에 꾸린 가정도 성공이었다. 중매로 만난 아내는 일본 문화복장학원에 유학 중인 미모의 재원이었다. 결혼 후 아내는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함께 1남 2녀를 키우면서 큰소리 한번 나는 일 없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 아이들 역시 엇나가지 않고 반듯하게 잘 자라주었다.

- 죽음의 경험이 심어준 삶의 지혜 -

한마디로 참 평탄한 삶이었다. 스스로 한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하고자 하는 일에 어떤 장애가 닥쳤다며 좌절한 적도 없으니, 돌아보면 참 신기하고도 이상한 내 인생이었다. 왜 그렇게 살아졌는지 이해된 것은, 나이 육십이 되던 해 지인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면서였다.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라는 존재가 쌓아온 모든 마음을 버리게 하는 마음수련은, 나라는 이기적인 존재를 없어지게 함으로써 편안한 순리의 삶을 살게 하는 명상이었다.

잉태되면서부터 죽음의 공포를 겪어야 했던 생명. 어머니는 그 시대 시골에서 듣고 알았던 아기 지우는 독한 약초를 먹었지만 지워지지 않아, 또 다른 약초를 과하게 먹었다가 아기보다는 당신이 돌아가실 뻔했다고 했다. 갑작기 배가 심하게 아프면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고, 뱃속의 아기가 요동을 쳐오면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몇 차례나 계속돼 죽을 뻔하셨다는 것이다. 그 후 어머니는 많이 후회했고,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다고 했다. 뱃속의 태아에게도 그것은 단순한 죽음의 공포를 넘어 이미 죽음의 목전에 갔던 경험이었으리라..... 죽음에 대한 경험은 또 있었다. 여덟살 무렵 냇가의 물에 빠진 적이 있다. 헤엄도 못 치는데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강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떠올랐다를 반복하면서 500 미터를 떠내려가다가 동네 형이 구해줘 살아났었다. 그렇게 죽음과 직면했던 경험은, 한순간 삶을 내려 놓게 하고, 삶이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잘나 사는 것이 아니라 순리에 의해 저절로 살아지는 것임을, 겸허하게 깨닫게 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쉬지 않고 일하며 학교에 다녔고, 집안의 대소사를 다 챙겼고, 50년 넘게 직접 선산을 관리했던 나다. 사회에 나와서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면서도 소소하게 쓰레기 분리수거, 청소, 설거지까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은 무조건 먼저 했다.

사람이라면 어찌 고생스럽고 힘들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어떻게 그렇게 힘들다, 하기 싫다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는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신기했는데, 그 이치가 마음수련을 만나면서 깨달아진 것이다.

성공 비결- 모두가 하나되어 사는 비결, 자기 마음 버리기 -

가장 아름다운 삶이란 순리의 삶이다.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이 내 뜻과 상관없이 저절로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저절로 사는 자체가 평화고 행복이다.

물이 돌을 만나면 피해 흐르고, 가다가 또 나무 둥치를 만나면 옆으로 흐르듯, 부지런히 움직이되 남들을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살면 저절로 성공하고 잘살게 된다. 아니, 그렇게 산다는 마음 없이 살아진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는 하나다, 마음을 모으자'라며 구호를 외치고 결의를 다지고는 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마음이 다 다르고 보니 그게 참 힘들다. 못 하나 박는 것도, 거울 하나 다는 것도, 이 사람은 이랬으면 좋겠다, 저 사람은 저랬으면 좋겠다 하고 부딪히는 것이 사람 마음이니 말이다. 그것이 해결되는 비결은 딱 하나다. 마음을 비워 자기 마음이 없어지면 저절로 내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상대를 존중하게 되고 하나가 되기에 서로 싸울 일도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마음 비우기를 통해 우리 삶과 마음의 이치까지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 오세천 님은 1939년 경북 김천에서 9남매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부산대학교 토목학과 졸업 후 건설공무원으로 재직했으며 부지런함과 청렴결백을 인정받아 우수공무원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1969년 결혼,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마음수련을 통해 삶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님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마음수련 명상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그 답을 찾다(미하이 미할치욱 / 루마니아 출신, 호주 퍼스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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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항상 내가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왜 존재하는가,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해답을 얻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것에 관한 질문을 부모님께, 학교 선생님께 그리고 일요일마다 교회 목사님께 했다. 모두들 나름의 답을 해주었지만 그냥 뭔가 아는 척을 하고 있을 뿐 아무도 정말로 답을 알고 있지는 못하다는 게, 어린 나이였지만 너무 명확했던 것 같다.

-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삶의 해답 -

시간이 흐르고 자라면서 이 질문들에 대해 포기하게 되었다. 내 스스로의 인생을 시작하면서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 인생,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자 열심히 파티를 하고 내가 끌어 모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모으자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많은 것들을 사고 또 많은 여자들을 만나도, 겉으로 잘사는 것처럼 보여도, 이런 것들로부터 오는 기쁨이나 즐거움은 잠시뿐이었고 오래가지 못했다. 나의 내면은 공허했고 불완전했고 무언가 채워지지 않았다. 내 마음은 영원한 행복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고, 가능하기는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몇 년 전이다. 부질없는 것들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삶이 너무 짜증이 나고 싫었는데 그와 동시에 내가 어린 시절 가졌던 그 질문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그냥 먹고 배설하는 게 다인가. 좀 더 잘살기 위해 현재는 항상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내가 상대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고 내가 상대보다 더 많은 돈, 더 큰집, 더 비싼 것들을 갖고 있는 것을 잘난 척하고, 그리고 죽는 것. 그게 정말 내가 사는 이유인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에 나섰다. 답을 찾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녔다. 종교로 다시 돌아가 보았고 깨쳤다는 사람들, 무당, 최면술사, 영적 스승이나 치유사라는 사람들을 만나보았고 또 수많은 책을 읽어 보았다. 또 깨침을 얻을 수 있다는 여러 명상도 해보았지만 그 어디서도 해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모든 질문의 답을 찾게 해준 마음수련 그러던 어느 날, 산책을 하던 중 퍼스 명상센터라는 간판을 보고 무작정 들어가 보았다. 짧은 안내 세미나를 받았는데 여기엔 인간마음을 우주마음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고 이 사람들은 그 길을 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가본 많은 곳들이 말만 많고 실제 방법이나 결과가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버리면 스스로 다 안다고 했다. 내가 원한 것은 답을 듣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답 자체를 찾고 싶은 거였기에, 바로 이곳이구나 싶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명상 방법에 따라 수련을 시작했다. 센터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내게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게 아니라 나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내가 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모두들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수련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고 쉬웠으며 난 그 방법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2주 만에 1과정을 마치는 순간 나의 가장 큰 질문이었던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알았다. 정말 기적과 같았다. 부모님은 평생 종교를 갖고 사셨지만 그분들조차 내가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답을 주진 못했다. 전 세계를 여행하고 진리를 찾으려 많은 것을 시도했지만 항상 공허할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 방법이 있었다.

1과정부터 7과정까지 하면서 나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나는 내 좁은 인간마음, 내 삶의 비디오테이프와 그 안에서 나온 수많은 생각 속에 있었기에 미완성이었고 삶은 스트레스와 고통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세상을 내 마음에 맞게 바꾸려다보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버림으로써 본래인 이 무한한 우주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이제 스트레스 대신 행복만 가득 -

이젠 참고향인 나의 본래를 찾았다. 인간 완성을 이루었다. 세상은 완전하고 난 평화롭고 영원한 안정을 찾았다. 삶의 고통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서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과 행복감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그 어떤 돈, 부와 명예도 내가 찾은 이 영원한 삶과 행복을 포기하게 하진 못할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감옥 같았던 인간마음에서 벗어나 영원히 행복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준 마음수련에 너무나 감사하다.

알렉산더 대왕은 칼로 세상을 정복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죽을 때 남긴 세 가지 부탁 중에 하나는 무덤에 갈 때 자기 손이 관 밖으로 보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왜 그런 이상한 부탁을 하는가 묻자 그의 답은 “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와서, 어떤 힘을 갖고 부자였든 유명했든 세상을 떠날 땐 빈손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보기를 바란다”였다. 이제 감사하게도 알렉산더 대왕의 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닌, 이 놀라운 명상 방법을 통해서, 진짜 세상을 가로막는 나의 거짓된 인간마음을 버려 참세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수련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고 쉬우며 누구나 할 수가 있다. 내가 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할 수 있다. 가까운 지역센터를 찾아 시작하길 바란다. 이제는 인간마음에서 벗어나서 우주마음이 되어 우리가 함께 살고 한마음으로, 하나로 사는 때가 온 것이다.

미하이 미할치욱 님은 루마니아의 작은 도시 프레제니에서 5남1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2005년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으며 창문기술자로 일하던 중 어린 시절부터 항상 궁금했던 삶은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책과 명상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많은 곳을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2014년 서부 호주로 이주한 후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마음수련 센터에 다니게 되었으며, 지금은 삶의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울증,불면증

우울증 극복,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 (마리아 트레이시 / 미국 라스베이거스 거주)

( 마리아 트레이시는 슬로바키아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합니다.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미국 생활을 시작했으나,외로움과 우울증으로 힘들었고, 그 마음의 고통은 결혼 생활로도 해결되지 못했다지요.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마음수련을 통해 이겨낼 수 있었다는 마리아 트레이시. 그녀의 솔직 담백한 마음 이야기입니다. )

- '미국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여...' 행복 찾아 떠난 미국행 -

나의 고향은 슬로바키아의 서쪽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마을로, 같은 동네 사람들끼리 시시콜콜한 모르는 게 없는, 그런 곳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슬로바키아의 수도에 있는 한 미국 회사에서 일을 했다. 그 시절 TV에서 미국 쇼를 많이 봤는데 그 속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나도 그렇게 행복해지고 싶었고 나는 뉴욕으로 가 어느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집안일을 해주는 대신 영어를 배우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남겨두고 떠나온 후 나는 외로워지기 시작했고 곧 우울증에 걸렸다. 새로운 친구도 많이 생겼으며 많은 곳을 가봤지만 그 어느 것도 행복하지 않았다. 식구들 생각을 자주 했고 많이 울었다.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남자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 생각하게 되었고 결혼을 했다. 그렇게 해서 이전에 꿈꾸었던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되었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 화가 나도, 슬퍼도, 행복해도 울고... 감정 조절 전혀 안돼 -

남편과 나는 라스베이거스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고 나는 더 우울해졌다.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시작했지만 그 약을 먹자 마치 내가 좀비가 된 느낌이었다. 내가 하는 일에 매우 집착을 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집에는 붙어 있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늘 울었다. 화가 나도, 슬퍼도, 행복해도 울었다. 감정을 전혀 조절할 수가 없었다. 속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 갔다가 마음수련 책자를 보게 되었다. 그 책자는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꽃과 함께 있었고 표지에 '마음수련(Meditation life)'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책자를 집어들고 집에 가지고 왔다. 그전에는 명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는데, 왜 이 명상을 '마음수련'이라고 하는지, 마음 (Mind) 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책을 남편에게 보여주었고 우리는 함께 공개강좌에 참석했다.

- 슬픔, 외로움, 화, 우울증... 점차 사라지게 한 마음수련 -

그 결정이 우리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일단 한 달만 해보기로 하고 별로 마음에 안 들면 안하기로 남편과 결정을 했는데, 두 달, 세 달, 그러다가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고 우리의 삶은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

" 마음수련은 정말 기적이다. 내가 살면서 겪었던 온갖 종류의 슬픔, 외로움, 화, 어두운 느낌, 내 우울증도 포함해서, 점차 점차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어디에서나 나를 따라다니고 내 삶의 매순간을 조종했으나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없어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 돈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스트레스, 이런 것들이 사라졌다. 마음수련을 하기 전에는 무언가를 진정으로 즐긴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어서 겉으로는 행복한 척,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척,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고 있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죽어 있었다. 마음수련은 나에게 영원한 행복과 평화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오랫동안 멀고 낯설게 느껴졌던 남편과 가족들에 대해서도 보다 잘 이해를 하게 되었고 좀 더 따뜻하고 감사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살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해결한다.

- 내가 힘들 때 그랬듯이, 마음수련은 당신을 위해 있는 것 -

내 성격 중에 안 좋은 점 하나는 한 번 화가 나면 며칠씩 간다는 것이다. 남편과 싸우고 나면 며칠, 어떨 때는 일주일씩 말을 안 하곤 했는데 이 버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의 이런 면이 싫었지만 고치는 방법을 몰랐다. 지금은 싸우고 나면 해결법을 금방 알 수 있다. 내 잘못을 더 잘 알게 되었고 더 이상 다른 사람들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가끔 남편이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이야기하지만, 나한텐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요즘 나의 삶은 마치 꽃봉오리들이 만개한 것 같다. 정말 모든 사함들이 마음수련을 했으면 좋겠다. 누구나 살면서 아주 힘든 순간이 있을 것이고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는지 모르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마음수련은, 내게 해주었듯이 당신을 위해 그곳에 있을 것이다.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다 (최심진 /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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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거울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서였다. 편안하고 밝고 안정된 얼굴이 아닌 경직되고 화가 난 듯 무서워 보이는 내 얼굴을 거울을 통해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웃을 일이 있을 때마저 활짝 웃지 못하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굳어져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나를 느끼게 될 때는 그것이 너무도 싫고 슬펐다. 마음이 힘들면 얼굴이 새까매져서 아무리 화장을 해도 감출 수 없었다.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을 봐도 산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보다는 그 삶의 무게가 너무도 벅차고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살다가 삶을 마감하고 결국엔 없어지는 게 인생이라면 왜 신은 인간을 만들어서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원망도 많이 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분명 이렇게 살다 가는 게 다는 아닐 텐데, 진정한 행복과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또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건지…. 세상 어디에도 답은 없는 것 같았다. 무엇을 해도 항상 그 끝에 찾아오는 건 알 수 없는 쓸쓸함과 허무함뿐이었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 마음속에 갇힌 만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에게 세상이란 창밖을 통해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대상, 아련하고 멀고 먼 남의 이야기였다.

- 엄마의 힘든 마음 물려주기 싫어 태교로 명상 시작 - “언니, 힘들어 보여. 마음수련 해봐. 해보니까 좋네.”

동생이 마음수련을 권했다. 좋다는 그 말에 끌려서 바로 지역센터에 등록해서 명상을 시작했다. 등록 후 며칠이 지나 임신 사실을 알았다. 유아교육을 공부했던 나는 태교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허무함과 쓸쓸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있는 엄마의 우울함이 뱃속의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아이를 위해서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거였기에 나는 명상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막연히 우울함의 원인이 엄마의 죽음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평생 너무도 힘들게 사신 엄마가 이제 좀 살 만하니까 돌아가셨을 때, 사는 게 뭔가, 세상에 나왔으면 행복하게 잘 살고 끝을 내야 하는데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인생 자체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가정을 가지면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 결혼도 했지만 내가 상상했던 결혼생활은 아니었다. 나와는 너무 다른 남편과의 부딪침 또한 점점 극에 달해 갈 뿐이었다. 이런 게 인생이라면 정말 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마음수련 명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명상을 통해 이 우울함의 원인은 엄마의 죽음 그 이전, 그보다 더 훨씬 이전부터 뿌리 깊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폭력적인 오빠로 인해 불우했던 어린 시절 -

나는 1966년 전라도 광주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아이 셋을 두고 사별하신 아버지가 재혼으로 맞은 두 번째 부인이 나의 엄마다. 아버지의 첫번째 부인은, 오빠를 낳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오빠는 그 충격이 커서인지, 엄마가 없어 마음을 못붙이며 자라서인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 안 가고 걸핏하면 집을 나갔고, 커가면서는 더욱 폭력적이 되었다. 술 먹고 와서 다 때려부수는 건 부지기수였고, 엄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상상을 초월해,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빠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빠가 집에 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조차 제대로 못 쉬었다. 제일 힘들었던 건 엄마가 이 집을 떠나려다가도 당신 자식들 때문에 다시 돌아왔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엄마가 너무도 불쌍하고 그러다가 언젠가는 엄마가 진짜로 사라질까 봐 무서웠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내가 아들인 줄 아셨단다. 오빠가 아들 역할을 못하니 아들을 간절히 바랐다가 낳고 보니 딸이라 실망이 크셨다. 게다가 첫째 언니는 돌 전에 기저귀를 뗐는데 나는 느리고 잘 가리지 못해 야단을 많이 맞았다고 한다. 언니들에 비해 똑똑하고 야무지지 못하다고 비교당하고 야단을 맞아서였을까, 나는 늦게까지 오줌 가리기도 잘 못했다. 밤에 잘 때면 실수할까 봐 겁나고 무서웠고, 자다가는 그 두려움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실례를 했다. 스스로 위축되고 자신감이 없어졌던 것 같다. 한번은 초등학교 가기 전 언니가 공부를 가르쳐줬는데 계속해서 틀리자 그걸 보고 있던 엄마가 심한 말을 했다. 그 순간부터 나 스스로 난 멍청하고 쓸모 없고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린 것 같다. 엄마의 그 부정적인 말들이 바로 내 인생 자체를 지배했다는 것을, 명상을 하며 이해하게 되었다 무엇을 하든 야단맞으면 어떻게 하지,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에 항상 사로잡혀서, 스스로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고 먼저 포기부터 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늘 불안감과 열등감에 휩싸여 있던 나. ‘난 못할 거야’ 하며 늘 위축됐던 내 모습은 그 모든 어린 시절의 기억들로 인해 형성된 나였다.

- 마음 비운 만큼 사라져간 우울과 불안의 뿌리 -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지 못해서 너무도 슬펐던 나, 오빠를 보면 늘 불안하고 무서웠던 마음, 엄마에 대한 원망 그리고 연민. 이 모든 마음들을 열심히 버리고 또 버리고 버렸다. 남들보다 늦어도 좋았다. 남들이 백 걸음 갈 때 나는 한 걸음 가겠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마음수련을 해나갔다. 그 결과 나에게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힘든 마음이 버려질수록 그 마음이 옅어지고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고, 어떻게 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았던 미움과 원망이 떠나고 대신 이해와 미안함이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은 불행하다는 마음에 갇혀 버린 채 그 한과 상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던 오빠. 그때 누구라도 정신적인 치료와 상담을 도와줬더라면 오빠도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사람은 배워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자식 교육을 위해, 매일 서너 시간씩밖에 못 주무실 정도로 생활력이 강하셨던 엄마. 하지만 큰아들 농사를 못 지었다는 죄책감에 늘 시달려야 했었다. 나머지 자식들이 위안이고 자부심이었을 엄마 입장이 되어보니, 그 세월을 지켜주신 엄마가 너무도 고맙고 감사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내가 받고 싶은 걸 주지 않는다고, 엄마한테 또 다른 비수를 꽂으며 살아왔었구나…. 엄마한테 미안했다. 좀 더 노력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열등감 뒤에 숨어 늘 자포자기하고 항상 주변에 바라기만 했던 날들도 떠올랐다.

- 편안해진 엄마 밝게 자란 딸, 마음수련은 최고의 태교 -

결국 나는 어릴 때 사진처럼 찍어 놓은 마음들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그렇게 나만 보호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나만의 마음세계 속에 갇혀 산다는 것이 정말 무서운 것이구나 싶었다.

어떤 마음이든 한 번 그렇게 입력이 되고 나면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 속으로 들어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하지만 그 모든 마음들을 버릴 수만 있다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내 속에 켜켜이 쌓여진 마음들이 깨끗이 비워진다는 것은, 곧 나의 삶이 자유로워지고 행동이 편안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 마음수련을 시작했을 때의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보면 놀랍다고 한다.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하고 사람들하고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나에게서는 옛날의 그 어두웠던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참, 딸아이의 이야기도 해야겠다.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는 자기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가 마음을 비워서인지 참 밝고 씩씩하다. 친구들이나 선생님과의 관계도 좋고 자기 일은 척척 알아서 하니, 마음수련은 정말 최고의 태교이지 않는가.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하지만 자기 마음이 있는 한 행복은 너무나 막연하다. 그 마음이 참으로 내려놓아질 때 찾아지는 것이 진짜 행복이다.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고, 거울 보기를 두렵지 않게 해준 이 마음수련은, 진정한 행복과 자유의 시작이라고.

대인관계

처세술 책 백 권보다 나은 대인관계 노하우(장혜정 / 컴퓨터 프로그래머)

("혜정씨는 인기가 많아서 좋겠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 같애."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는구나 느끼게 되었다. 전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사람은 내가 노력을 해야만 오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도적인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순간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나로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 부담스러운 숙제 같았던 인간관계 -

그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마음수련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남자친구며 여러 인간관계가 생각처럼 되지 않아 힘들 때 마음수련을 하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을까? 20대 후반경에는 아예 그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회사생활 잘하는 방법, 상사한테 인정받는 방법 등등.... 그런 책들에서는 기술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화할 땐 얼마 만에 한 번씩 맞장구를 쳐줘라, 생일을 기억해 놨다가 카드를 보내라 등등의 지침을 챙기기 위해 더 분주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인간관계가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예전엔 사람들 사이엔 의무 같은 게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라면, 선배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런 기준을 까다롭게 적용시키다 보니 상대도 부담스러워했다. 누구와도 안전된 관계는 이어지질 않았고, 나는 조급했다. 인간관계란 내가 뭔가를 끊임없이 해야 유지되는 부담스런 숙제 같았다.

- 인간관계 잘하는 방법, 그 열쇠를 찾다 -

수련을 하면서 내가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어떤 요령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인지도 알았다. 모든 인연은 다 순리대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인데, 모두 다 내 기준에 맞추려고 억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주위 사람들도 변화된 나에 대해 호감과 신뢰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마음수련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알게 됐다. 상대에 대한 마음이 없으면 된다. 상대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없고,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내 입장에서 시시비비를 안 하면 정말 편안하게 대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을 못하고 산다.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려주기가 어렵다. 처세술 100권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간단한 일, 인간관계를 여는 간단한 열쇠 하나가 내 입장을 버리고 세상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나를 버리면 누구에게나 맞는 만능 열쇠가 되어버린다.


마음수련 교원직무연수 후 변화된 대인관계 (강윤숙 /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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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았던 나 -

나 혼자만 잘나, 친구들도 무시했었다. 그래서인지 친구가 많지 않았다. 친구들도 착한 얼굴로 앉아 속으로는 자신을 무시하던 나의 마음을 알았나 보다. 사실 자라면서 어른들에게 칭찬받고, 선생님께 칭찬받고, 부모님에게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던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줄 알았다.

대학 때도 친구들보다 더 인생을 깊이 있게 살고 있고, 진실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중학교 선생님이 되어서도 그랬다. 다른 선생님들은 내가 생각하는 ‘바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더욱 나와 성향이 다른 선생님들과 마찰이 많았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항상 그분들은 불편해했고, 서로 불만이 많다는 걸 느꼈다. 학생들이 내 진실된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원망스러웠다.

항상 잘났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던 나였기에 결혼생활도 무척 힘들었다. 나에게 부조리한 많은 걸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어머니와 나와 진실된 삶을, 평등한 삶을 살자고 약속했던 남편이 그 언저리에 가지도, 가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여 짜증 났다. 짜증은 우리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어느 날 “엄마, 나에게 소리 지르지 마. 무서워!”라고 큰딸이 하소연했다.

- 마음 버리자 비로소 보인 남편, 시어머니의 원래 모습 -

동료 교사의 소개로 마음수련 교원직무연수를 했다. 여러 날, 내 인생,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깊은 반성의 눈물을 흘렸다. 내 마음과 씨름하면서, 그 마음들을 하나씩 하나씩 버려나갔다. 그러면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 가족, 남편, 딸들, 시댁 식구들, 친구들, 학생들, 선생님들에게 정말 ‘잘못했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마음수련 교원직무연수를 한 후 사람들과의 부딪침이 점점 줄었다. 매일 저녁, 그날의 나를 돌아보면서 마음을 버렸다. 지금은 매 순간 그 마음들을 버린다. 어느 사이엔가 산다는 것이, 인생이 너무나 즐겁고 기뻤다. 집에서 가족들과 있으면 가족들과 있어서 행복하고 좋다. 학교에 오면 학생들과 선생님들과 얘기하고 떠들며 하루가 즐겁다.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들었나 생각해 봤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에 대한 ‘바람’이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학생들에게, 주위 선생님들에게 바라는 것이 많았다. 다 내 입장에서 좋은 것,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버리고 본 남편은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입장보다 나를 더 생각해 주는 정말 ‘착한 남편’이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고생하지 않도록 자신이 대부분을 희생하시는 헌신적인 분이셨다. 아이들은 내 인생의 행복함을 같이 즐기라고 하늘이 보내준 동락자(同樂者)였다. 더 이상 내가 옳은 것을 교육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 내가 달라진 걸까? 아이들이 달라진 걸까? -

예전엔 학년 부장님과 자주 부딪쳤다. 교육적이지 않은 많은 것들을 나에게 강요한다고 여겼다. 주위 선생님들도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가 없이 불편했다. 지금 나는 학교에서 만나는 모든 선생님들의 팬이다. 참 열심히 살며 교육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럽다. 그 선생님들과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지내는 시간이 마냥 즐겁다.

중학교 1학년 아침 독서시간. 책을 읽다가 아이들을 바라봤다. 이 아이들은 참으로 마음을 잘 연다. 내가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면 나를 향해 마음을 활짝 열고 기다린다. 그리고는 곧 나와 친구가 된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워주길 바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예전에 나는 학생의 장점보다 단점을 훨씬 많이 알고 있는 교사였다. 내 교실에는 장점이라고는 눈 씻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학생들만 있었다. 내가 달라진 걸까, 학생들이 달라진 걸까. 답은 너무나 분명했다.

난 지금 단점보다 장점을 훨씬 많이 가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이렇게 많은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게 됐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원래부터 아름다운 인연으로 내 옆에 있었다. 그것을 알게 해준 마음수련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