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수련 후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마음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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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다''' (최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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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다''' (최심진 / 직장인)
  
 
난 거울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서였다. 편안하고 밝고 안정된 얼굴이 아닌 경직되고 화가 난 듯 무서워 보이는 내 얼굴을 거울을 통해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난 거울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서였다. 편안하고 밝고 안정된 얼굴이 아닌 경직되고 화가 난 듯 무서워 보이는 내 얼굴을 거울을 통해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2021년 4월 30일 (금) 13:57 판

개요

직장인

엔지니어로서의 나의 견해

저는 서울에 사는 직장인입니다.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저녁 6시까지 열심히 일을 합니다. 물론 가끔 야근도 하구요 주말에는 주로 가족들과 혹은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외국어 공부와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런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저는 마음수련이라는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수련 명상을 한지 약 8년 정도 됐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데 빠진 거 아니야?

저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한 대기업에서 설계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되고 잘 믿지도 않는 성향의 사람이죠. 마음수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시절 한 선배를 통해서였습니다. 학창시절 항상 1등을 놓치지 않는 똑똑하고 멋있고 존경스러운 선배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휴학을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한참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선배의 모습과는 달리 그 동안 마음은 많이 힘들었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저 같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리 그 선배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과 고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알고 보니 선배는 그 시기에 마음수련이라는 명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본 후,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았고 보다 집중적인 수련을 위해 살면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시간을 선물로 준 것 이었죠. 그 당시엔 지금처럼 명상이라는 것이 널리 대중화 되지 않았던 시기라, 어떤 걸 하는지 저도 이해가 좀 부족했기 때문에 혹시 이상한 거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잠시 했었어요. 그런데 복학을 한 그 선배님을 보면서... 정말 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왜냐하면 복학 후에 그 선배의 변한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거든요.

가장 큰 차이는 정말 행복해보였다는 거예요.

뭐... 원래도 착하고 똑똑한 선배였지만, 조금은 예민하고 행복해보이지는 않았는데, 다시 만난 그 선배의 모습은... 참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매사에 늘 밝고 긍정적이고 남을 먼저 배려하고, 항상 마음에 여유가 있었고 무슨 일을 하던지 먼저 솔선수범 하곤 했었죠. 뭐랄까... 그 나이 또래 대학생들보다 의식 수준이 훨씬 컸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다보면 당연히 어렵고 힘든 일도 겪는데, 그 때마다 당황하지 않고 참 침착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정말 부럽고 존경스러웠어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참 궁금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 날은 제가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선배, 거기 뭐하는 곳 이예요?”

“음... 그냥 마음 버리는 곳이야.”

“마음 버리는 곳? 마음을 어떻게 버려요...?

그리고 선배가 들려준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그 동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본인도 오랫동안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경험과, 마음수련 명상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또 버리면서 깨달은 것들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에 대한 부분이 참 많이 공감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그 걸 솔직하게 이야기해준 그 선배가 참 고마웠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마음수련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나를 철저하게 돌아볼 수 있는 곳

선배는 마음수련이 '마음 버리는‘ 곳이라고 했는데, 그 말도 맞지만 저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내가 살아온 삶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찬찬히, 그리고 덤덤하게 되돌아보는 과정의 연속이었습니다. 나를 돌아본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1과정부터 7과정까지 전 과정에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 공통적으로 포함되어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구체적으로 샅샅이 떠올려 보았습니다.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보다 보니 삶에 대한 후회도 있었고 깊은 뉘우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사함이라고는 모르던 제가 사소한 것에도 세상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게 됐죠. 수련 방법은 글로 알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어쨌든 큰 틀은 '나를 돌아보는 것' 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련을 거듭할수록 나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걱정의 상당부분이 해소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진짜 저도 돌아보니 알 것 같았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다보니 현재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본성을 찾는 곳

우주, 진리라는 종교적인 느낌의 용어 때문에 처음에는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단어들이 '내 자신을 돌아보고 버려나가는 과정을 통해 발견되는 본성'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단어에 매이기보다는 그 뜻과 의미에 더 집중했습니다. 사람의 본성을 찾고자 했던 노력은 고대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상가들이 추구해왔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 우주, 하늘, 본성 등을 일컫는 단어들도 참 많았던 것 같아요. 유학에서도 사람의 본래 모습을 우주라고 했고 방법을 통해 본성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요. 제가 경험해본 마음수련 명상은, 본성을 찾아 그 마음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마음수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막연하게 '도 닦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이제는 '마음 전문 기관'이라는 느낌이 더 큽니다. 음... 적어도 제가 경험해본 마음수련은 이게 전부입니다.

나를 돌아보는 방법이 있는 곳. 본성을 찾을 수 있는 곳.

이름 그대로. 마음 수련.

저는 마음수련을 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것 같아요. 어떤 일을 하던, 욕심과 집착이 아닌 순리대로 지금 이 순간에 맡은바 최선을 다해서 하고, 내 것만 옳다고 고집하는 것 대신 각자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배려하고,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기 보다는 내 안의 가시 같은 마음들이 없는지 먼저 돌아보고 없애고,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 대신 다 함께 더불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유있는 마음과 태도를 배우게 된 것 같아요.

예전에 프랑스 철학자 에밀 사르티에 (Emil Chartier)는 이런 말을 했었죠. "당신이 단 하나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그만큼 융통성 있는 사고와 포용력이 중요하다는 거겠죠.

저도 이제 마음수련을 한지 8년째가 되네요. ^^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뀐 건 없지만 단 한 가지 알게 된 건, 마음도 가꾸고 관리를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더 소홀해지기 쉬운 것도 마음이죠. 그리고 저는 젊은 나이에 마음수련을 통해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또 가꿀 수 있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 비우는 게 습관이 되다보니 여유가 생기고 문제가 생겨도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 같아요.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에게 '너는 좀 다른 것 같다, 편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예전에 비해 바뀌긴 바뀌었구나하는 생각도 들고요. 가족 중에 누군가가 마음수련에 너무 빠진 건 아닐까 고민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걱정입니다.

또 마음수련에 관심이 있지만 막상 하려니 고민이실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부모님께서 처음에는 잘 모르는 것이니 약간 걱정도 하셨지만, 무엇보다 제가 행복해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시고는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이제는 부모님도 저와 함께 매일 같이 명상을 하시는데, 제가 보기에도 부모님 사이도 훨씬 좋아지셨고 스트레스도 줄어들고, 몸도 건강해지셨다고 참 만족스러워 하십니다. 자식이 성인이 되면 부모님과 관심사가 달라지다 보니 저절로 대화도 줄어들고 서먹해지기 마련인데, 저는 부모님과 같이 명상을 하면서 마음에 대해서 대화를 많이 하다 보니 이제는 진짜 부모자식 관계를 넘어 좋은 친구가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무엇보다 이점이 저는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최고의 선물을 드린 것 같아서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음수련원 에서 찾은, 트라우마 극복하는 비법!

소방관.png

장학수 소방관. 그가 하는 일은 화재, 교통사고, 산악 사고 등 각종 위급 상황이 발생할 때 출동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직업의 특성상 참혹한 사고 현장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겪는 이른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통받아야만 했다. 마음 빼기를 하며 비로소 그 기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장학수(46) 소방관. “이제 그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각종 사고 현장에서 보게 되는 처참한 광경이에요. 제가 처음 죽음을 접했던 건 교통사고 현장이었죠. 중년 여성의 운구를 이송했었는데 뇌리에 오랫동안 남더라고요. 2005년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따고 본격적으로 응급구조 업무를 하면서 상황은 더했어요. 추락사, 자살, 교통사고 등 각종 사건 사고들을 접하다 보니 어느새 장면 장면이 진하게 각인이 되더라고요. 일하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고 꿈에도 나타나고 가위눌림도 당하고….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과 유사한 현장에 갔을 경우엔 그때 기억이 다시 떠오르니까 참 많이 괴로웠죠. ‘제발 이런 걸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굴뚝같았어요. 정말 이직을 하고 싶을 정도였죠.

그 무렵 우연히 마음수련에 대해 알게 됐어요. ‘진짜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이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거기서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그 방법을 간절히 찾던 중이라 바로 논산 메인센터에 갔습니다.

처음엔 기억을 떠올려 버린다는 게 힘들데요. 특히 죽음과 관련된 사진을 버릴 때는 그 감정 속에 빠져서 허우적대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어디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면서 오기 반 간절함 반으로 버려나가 봤어요. 신기한 건 수련한 지 3일이 지났을 뿐인데, 머리만 대면 바로 잠이 든다는 거예요. 수면 장애가 있어서 잠 한번 자려면 한 시간 이상을 뒤척이면서 실랑이를 벌여야 했거든요. 자다가도 3~4번씩 깨니까 늘 피곤했는데, 잠을 푹 자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제가 바뀌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우선 출동에 대한 두려움들이 조금씩 사라지더라고요.

무엇보다 좋았던 건 나를 괴롭혔던 그 참담한 기억들의 끄달림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늘 회피하고 싶었던 현장에서 사건 사고를 담담하게 처리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놀라기도 하고요. 그렇게 마음의 평온을 찾으니까 하루에 10건 이상씩 사고 처리를 해도 피곤한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그때 진정한 휴식은 마음에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소방관, 경찰관 등은 다른 직종에 비해 외상 후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밝아 보여도 눌러놓고 지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이런 직종의 분들은 특히 마음수련을 했으면 좋겠어요. 집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듯이, 우리의 마음도 한 번쯤 싹 리모델링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힘든 마음들 털어내고, 무거운 기억들을 빼내고 나면 새롭게 편안하게 살 수 있으니까요. 요즘은 출동벨이 울리면 그냥 몸이 뛰어나가지, 어떤 번뇌도 생각도 없어요. “가자! 빨리 가자!” 하고, 오직 내가 필요한 그곳을 향해 힘차게 출동할 뿐입니다.


아토피 전문 한의사 박치영씨의 마음수련 이야기

한의사 박치영.png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어요.” 피부 계통의 명의로 알려진 박치영 한의사. 그가 환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오랫동안 심한 피부병을 앓으며 생긴 환자들의 마음의 병까지도 함께 치료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보통 서양의학에서 아토피는 난치성 질환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90% 이상 치료된다고 확신한다. 그 치료법의 근본 원리는 바로 ‘독소 빼기’. 박치영 한의사가 전하는, 행복한 삶을 위한 몸 마음 빼기 이야기. 정리 최창원 사진 김혜진 피부 질환을 고치려면 먼저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해요. 살아온 환경은 어떤지, 작업 여건은 어떤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그래서 환자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오랫동안 아토피 같은 피부병을 앓고 나면 마음까지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심하면 대인기피증이나 우울증까지 앓기도 하죠.

특히 요즘에는 ‘국민병’이라고 할 만큼 아토피 환자가 많아졌는데, 아이가 어릴수록 부모는 말도 못하게 힘들어요. 통증보다 참기 힘든 게 가려움인데, 하루 종일 긁고 보채고 우는 데다 몸을 하도 긁어서 온몸에 피가 나는 걸 봐야 하니까요. 정말 하루 종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되지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꼭 낫게 해드리고 싶어집니다.

“잘 오셨습니다. 피부병은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같이 치료해봐요.”

이런저런 치료 방법들을 시도해보다 좌절하신 분들이 많기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치료를 시작합니다. 피부병이 낫는 데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해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을 잡지요. 점점 염증이 사라지고 깨끗한 새살이 돋아나면서 환자들 얼굴에 웃음이 피어날 때 저도 너무 행복해져요. 사실 서양의학에서는 아토피는 난치성 질환이라고 해요. 하지만 저는 그동안의 경험상 90% 이상은 치료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치료 원리는 단순해요. ‘배독 요법’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빼기 치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잘못된 식습관이나 생활 습관으로 생긴 내부의 염증이나 독소들을 땀으로 빼내는 거예요. 그래서 한약 처방과 함께 목욕법, 운동법, 식이요법 등을 병행합니다. 좁은 공간에서도 할 수 있는 절 운동을 권하기도 해요. 30분 정도 절을 하면 땀이 나면서 독소도 제거되고, 아무 생각이 없어지면서 스트레스 관리도 되거든요.

피부는 내부 장기의 건강 상태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아요. 동의보감에 ‘폐주피모(肺主皮毛)’라는 말이 있는데, 즉 폐가 피부와 털을 주관한다는 말입니다. 아토피를 예를 들면, 폐와 호흡기를 중심으로 한 전신의 불균형에서 온 이상(atophos) 현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신체에서 발생하는 열이나 탁한 기운이 배출될 수 있도록 폐 기능을 향상시켜 주고, 장기의 균형까지 잡아주는 방법을 통해 근본적인 치료를 하는 거지요.

그리고 마음의 빼기도 정말 중요합니다. 염증(炎症)이라고 할 때, 염은 불 화(火)자 두 개가 붙잖아요. 오늘날 아토피의 원인은 스트레스가 많아요. 화병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가 당황하거나 열 받으면 얼굴이 붉어지잖아요. 긴장, 우울, 분노, 근심, 걱정 같은 마음의 스트레스들이 몸의 기혈을 막고, 혈액의 흐름을 정체시키니까, 피부에도 영향을 끼치는 거죠. 그래서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피부도 칙칙해져요.

스트레스가 많은 분들에게는 마음 빼기를 함께 권해요. 피부 관리 노하우를 묻는 분들에게도 고가의 화장품이나 좋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 빼는 게 훨씬 더 좋은 방법이라고 얘기합니다. 스트레스를 빼내고, 몸에 안 좋은 것을 덜 먹고, 등산 운동 반신욕 등을 통해서 독소를 빼내는 습관이 몸에 배면 피부 건강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빼기 치료’를 이해하게 되고, 한의사로서의 비전을 갖게 된 것은 마음수련을 통해서였습니다. 마음수련은 대학 본과 2학년 때 하게 되었는데, 마음수련의 원리는 정말 과학적이고 간단했어요. 내가 쌓아온 마음을 빼버리면, 원래의 마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죠. 한의학에서는 사람을 소우주라고 하잖아요. 실제로 마음수련을 하다 보니까 내가 우주고, 사람이 우주더라고요. 그걸 알고 난 뒤로는 한의학이 너무나 잘 이해가 갔어요.

그러다가 운 좋게 공중보건한의사 생활을 하면서 피부 질환 치료에 엄청난 노하우가 있는 한의사분을 만나게 됐어요. 그래서 그분의 스승님도 만나게 됐는데, 치료의 원리는 빼기였어요. 이미 마음수련을 하면서 빼기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딱 다가왔지요.

제대 후에 한의원을 개원해서, 본격적으로 환자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중증의 아토피 환자, 건선, 지루성피부염, 두드러기, 여드름…. 수없이 많은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면서 모든 피부병이 ‘빼기의 원리’로 나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지요. 그리고 실제 낫는 병인데도 ‘아토피는 불치병’이라고 인식하는 의사들이 많은 게 안타까워서, 책도 쓰고 무료 강의도 했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노하우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거든요.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제가 단순히 피부의 병만이 아니라 삶의 희망까지 줄 수 있는 의사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에 한 환자분이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보내셨어요.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연애 한번 못해본 아가씨였거든요. 온갖 좋다는 방법을 다 써 봐도 안 되니까 마지막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저희 한의원에 온 거였어요. 1년 정도 꾸준히 치료받으면서 나았는데, 그 아가씨의 소원이 연애였거든요. 그런데 결혼을 하신다니 정말 기쁘잖아요. 그래서 더 많이 연구하고 노력하게 돼요.

“원장님은 행복하십니까?” 언젠가 한 환자분이 진료 중에 물어보신 적이 있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했지만 “예,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라는 대답이 저도 모르게 나오더군요. 그분이 보시기에 제가 늘 행복해 보여서, 언젠가 꼭 묻고 싶으셨대요.

사실 한의사라는 직업이 겉으로는 좋아 보여도, 평수 없는 감옥에 산다는 말을 많이 해요. 하루 종일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봐야 하는 직업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다행히도 학생 때부터 매일매일 마음을 빼면서 살다 보니까, 갈수록 세상에 대한 믿음도 생기고, 점점 편해져간 거 같아요. 지금도 늘 하루를 돌아보며 저에게 묻습니다. "오늘 하루 환자분들에게 최선을 다했는가? 한분 한분 귀하게 대했는가? 초심을 잃어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누구를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마음

마음 없이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 (오세천,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내가 너를 보면 무섭다....."

초등학교 때였다. 육이오 전쟁 중이었지만 소를 몰고 온 들판을 다니며 풀을 먹이고 들어오는 나에게 ,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이후에도 어머니는 종종 '내가 너를 보면 덜컥 겁이 난다'고 하셨다 어린아이가 그 힘든 농사일을 너무 악착같이 하니, 놀랍고 기특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아니 뱃속에 있을 때 지우려고 약까지 먹었는데, 끈질긴 생명력으로 태어난 아이가 누구도 안 하려 하는 힘든 일들을 하니, 안쓰럽고 미안해서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

9남매 중에 일곱 번째로 태어났기에, "내가 너를 지우려고 약을 먹었었다'는 말씀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흘려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잠재의식 깊이에는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게 자리 잡혀서였을까. 생존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커서였을까.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아니 열심히 살아졌다.

삶의 의미 - 내가 사는 것인가, 저절로 살아지는 것인가 -

우리 집은 집터만 400평이 넘는, 여러 소작농까지 둔 부유한 농가였다. 해방 후 바로 내가 8세 때 사회주의가 들어오면서 토지개혁이 일어나 소작농지를 다 분배해야 했지만 우리가 직접 짓는 땅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에 일본 메이지대에서 유학을 할 정도로 식자였던 아버지, 부유한 농가에서 귀하게 자란 형과 누나들은 농사일을 힘들어했다. 그 많은 일들을 힘들다는 생각도 없이 한 것은 나였다. 아직 어리니 일을 안 한들 뭐라 할 사람도 없었건만,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이 저절로 눈이 떠지고 몸이 움직여졌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2~3분 거리에 있는 교회에 가서 종을 치고, 들에 나가 일을 하다가 학교에 가고, 학교에 다녀와서 또 일을 했다. 부지런히 열심히 사는 것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내가 손대는 일은 이상하게 다 잘되고, 내가 하는 농사는 언제나 남들보다 몇 배의 수확을 거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육이오 사변으로 마을에 폭탄이 많이 떨어져 마을 곳곳이 폐허가 되고 고철들이 생겼다. 그게 돈이 될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나는 고철이 보이면 새끼줄로 묶어 집으로 끌고 와서 마당 한쪽에 쌓아놓았다.그것이 중학교 1학년 때의 일, 이후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에는 가격이 많이 올라서 큰 도움이 됐었다.중학교 2학년 때는 당시 특수농작물이었던 담배농사를 지어 고수익을 냈고, 담배농사 이후에는 고구마농사로 전환하여 또 많은 수익을 올렸다. 건강하고 힘이 좋아서 그 무거운 고구마 자루를 혼자 거뜬히 수레에 옮겨 싣고 나가 가게에 팔기도 했다. 중학생이 뭘 알아서 그랬겠는가. 이렇게 하면 돈을 벌 거야 하는, 어떤 계산도 없이 그저 열심히 움직이고 나면 그것이 필요한 등록금이 되고 생활비가 된 것이다.

원하던 대학의 토목학과에도 무난히 들어가고, 그 어렵다는 기술사 시험에도 한번에 합격했다. 이후 건설공무원을 하면서 우수공무원으로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나이 서른에 꾸린 가정도 성공이었다. 중매로 만난 아내는 일본 문화복장학원에 유학 중인 미모의 재원이었다. 결혼 후 아내는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함께 1남 2녀를 키우면서 큰소리 한번 나는 일 없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 아이들 역시 엇나가지 않고 반듯하게 잘 자라주었다.

- 죽음의 경험이 심어준 삶의 지혜 -

한마디로 참 평탄한 삶이었다. 스스로 한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하고자 하는 일에 어떤 장애가 닥쳤다며 좌절한 적도 없으니, 돌아보면 참 신기하고도 이상한 내 인생이었다. 왜 그렇게 살아졌는지 이해된 것은, 나이 육십이 되던 해 지인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면서였다.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라는 존재가 쌓아온 모든 마음을 버리게 하는 마음수련은, 나라는 이기적인 존재를 없어지게 함으로써 편안한 순리의 삶을 살게 하는 명상이었다.

잉태되면서부터 죽음의 공포를 겪어야 했던 생명. 어머니는 그 시대 시골에서 듣고 알았던 아기 지우는 독한 약초를 먹었지만 지워지지 않아, 또 다른 약초를 과하게 먹었다가 아기보다는 당신이 돌아가실 뻔했다고 했다. 갑작기 배가 심하게 아프면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고, 뱃속의 아기가 요동을 쳐오면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몇 차례나 계속돼 죽을 뻔하셨다는 것이다. 그 후 어머니는 많이 후회했고,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다고 했다. 뱃속의 태아에게도 그것은 단순한 죽음의 공포를 넘어 이미 죽음의 목전에 갔던 경험이었으리라..... 죽음에 대한 경험은 또 있었다. 여덟살 무렵 냇가의 물에 빠진 적이 있다. 헤엄도 못 치는데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강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떠올랐다를 반복하면서 500 미터를 떠내려가다가 동네 형이 구해줘 살아났었다. 그렇게 죽음과 직면했던 경험은, 한순간 삶을 내려 놓게 하고, 삶이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잘나 사는 것이 아니라 순리에 의해 저절로 살아지는 것임을, 겸허하게 깨닫게 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쉬지 않고 일하며 학교에 다녔고, 집안의 대소사를 다 챙겼고, 50년 넘게 직접 선산을 관리했던 나다. 사회에 나와서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면서도 소소하게 쓰레기 분리수거, 청소, 설거지까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은 무조건 먼저 했다.

사람이라면 어찌 고생스럽고 힘들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어떻게 그렇게 힘들다, 하기 싫다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는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신기했는데, 그 이치가 마음수련을 만나면서 깨달아진 것이다.

성공 비결- 모두가 하나되어 사는 비결, 자기 마음 버리기 -

가장 아름다운 삶이란 순리의 삶이다.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이 내 뜻과 상관없이 저절로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저절로 사는 자체가 평화고 행복이다.

물이 돌을 만나면 피해 흐르고, 가다가 또 나무 둥치를 만나면 옆으로 흐르듯, 부지런히 움직이되 남들을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살면 저절로 성공하고 잘살게 된다. 아니, 그렇게 산다는 마음 없이 살아진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는 하나다, 마음을 모으자'라며 구호를 외치고 결의를 다지고는 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마음이 다 다르고 보니 그게 참 힘들다. 못 하나 박는 것도, 거울 하나 다는 것도, 이 사람은 이랬으면 좋겠다, 저 사람은 저랬으면 좋겠다 하고 부딪히는 것이 사람 마음이니 말이다. 그것이 해결되는 비결은 딱 하나다. 마음을 비워 자기 마음이 없어지면 저절로 내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상대를 존중하게 되고 하나가 되기에 서로 싸울 일도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마음 비우기를 통해 우리 삶과 마음의 이치까지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 오세천 님은 1939년 경북 김천에서 9남매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부산대학교 토목학과 졸업 후 건설공무원으로 재직했으며 부지런함과 청렴결백을 인정받아 우수공무원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1969년 결혼,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마음수련을 통해 삶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님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마음수련 명상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

마음의 병

우울증 극복,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 (마리아 트레이시 / 미국 라스베이거스 거주)

( 마리아 트레이시는 슬로바키아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합니다.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미국 생활을 시작했으나,외로움과 우울증으로 힘들었고, 그 마음의 고통은 결혼 생활로도 해결되지 못했다지요.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마음수련을 통해 이겨낼 수 있었다는 마리아 트레이시. 그녀의 솔직 담백한 마음 이야기입니다. )

- '미국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여...' 행복 찾아 떠난 미국행 -

나의 고향은 슬로바키아의 서쪽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마을로, 같은 동네 사람들끼리 시시콜콜한 모르는 게 없는, 그런 곳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슬로바키아의 수도에 있는 한 미국 회사에서 일을 했다. 그 시절 TV에서 미국 쇼를 많이 봤는데 그 속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나도 그렇게 행복해지고 싶었고 나는 뉴욕으로 가 어느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집안일을 해주는 대신 영어를 배우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남겨두고 떠나온 후 나는 외로워지기 시작했고 곧 우울증에 걸렸다. 새로운 친구도 많이 생겼으며 많은 곳을 가봤지만 그 어느 것도 행복하지 않았다. 식구들 생각을 자주 했고 많이 울었다.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남자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 생각하게 되었고 결혼을 했다. 그렇게 해서 이전에 꿈꾸었던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되었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 화가 나도, 슬퍼도, 행복해도 울고... 감정 조절 전혀 안돼 -

남편과 나는 라스베이거스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고 나는 더 우울해졌다.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시작했지만 그 약을 먹자 마치 내가 좀비가 된 느낌이었다. 내가 하는 일에 매우 집착을 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집에는 붙어 있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늘 울었다. 화가 나도, 슬퍼도, 행복해도 울었다. 감정을 전혀 조절할 수가 없었다. 속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 갔다가 마음수련 책자를 보게 되었다. 그 책자는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꽃과 함께 있었고 표지에 '마음수련(Meditation life)'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책자를 집어들고 집에 가지고 왔다. 그전에는 명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는데, 왜 이 명상을 '마음수련'이라고 하는지, 마음 (Mind) 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책을 남편에게 보여주었고 우리는 함께 공개강좌에 참석했다.

- 슬픔, 외로움, 화, 우울증... 점차 사라지게 한 마음수련 -

그 결정이 우리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일단 한 달만 해보기로 하고 별로 마음에 안 들면 안하기로 남편과 결정을 했는데, 두 달, 세 달, 그러다가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고 우리의 삶은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

" 마음수련은 정말 기적이다. 내가 살면서 겪었던 온갖 종류의 슬픔, 외로움, 화, 어두운 느낌, 내 우울증도 포함해서, 점차 점차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어디에서나 나를 따라다니고 내 삶의 매순간을 조종했으나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없어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 돈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스트레스, 이런 것들이 사라졌다. 마음수련을 하기 전에는 무언가를 진정으로 즐긴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어서 겉으로는 행복한 척,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척,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고 있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죽어 있었다. 마음수련은 나에게 영원한 행복과 평화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오랫동안 멀고 낯설게 느껴졌던 남편과 가족들에 대해서도 보다 잘 이해를 하게 되었고 좀 더 따뜻하고 감사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살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해결한다.

- 내가 힘들 때 그랬듯이, 마음수련은 당신을 위해 있는 것 -

내 성격 중에 안 좋은 점 하나는 한 번 화가 나면 며칠씩 간다는 것이다. 남편과 싸우고 나면 며칠, 어떨 때는 일주일씩 말을 안 하곤 했는데 이 버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의 이런 면이 싫었지만 고치는 방법을 몰랐다. 지금은 싸우고 나면 해결법을 금방 알 수 있다. 내 잘못을 더 잘 알게 되었고 더 이상 다른 사람들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가끔 남편이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이야기하지만, 나한텐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요즘 나의 삶은 마치 꽃봉오리들이 만개한 것 같다. 정말 모든 사함들이 마음수련을 했으면 좋겠다. 누구나 살면서 아주 힘든 순간이 있을 것이고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는지 모르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마음수련은, 내게 해주었듯이 당신을 위해 그곳에 있을 것이다.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다 (최심진 / 직장인)

난 거울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서였다. 편안하고 밝고 안정된 얼굴이 아닌 경직되고 화가 난 듯 무서워 보이는 내 얼굴을 거울을 통해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웃을 일이 있을 때마저 활짝 웃지 못하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굳어져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나를 느끼게 될 때는 그것이 너무도 싫고 슬펐다. 마음이 힘들면 얼굴이 새까매져서 아무리 화장을 해도 감출 수 없었다.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을 봐도 산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보다는 그 삶의 무게가 너무도 벅차고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살다가 삶을 마감하고 결국엔 없어지는 게 인생이라면 왜 신은 인간을 만들어서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원망도 많이 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분명 이렇게 살다 가는 게 다는 아닐 텐데, 진정한 행복과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또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건지…. 세상 어디에도 답은 없는 것 같았다. 무엇을 해도 항상 그 끝에 찾아오는 건 알 수 없는 쓸쓸함과 허무함뿐이었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 마음속에 갇힌 만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에게 세상이란 창밖을 통해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대상, 아련하고 멀고 먼 남의 이야기였다.

- 엄마의 힘든 마음 물려주기 싫어 태교로 명상 시작 - “언니, 힘들어 보여. 마음수련 해봐. 해보니까 좋네.”

동생이 마음수련을 권했다. 좋다는 그 말에 끌려서 바로 지역센터에 등록해서 명상을 시작했다. 등록 후 며칠이 지나 임신 사실을 알았다. 유아교육을 공부했던 나는 태교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허무함과 쓸쓸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있는 엄마의 우울함이 뱃속의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아이를 위해서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거였기에 나는 명상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막연히 우울함의 원인이 엄마의 죽음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평생 너무도 힘들게 사신 엄마가 이제 좀 살 만하니까 돌아가셨을 때, 사는 게 뭔가, 세상에 나왔으면 행복하게 잘 살고 끝을 내야 하는데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인생 자체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가정을 가지면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 결혼도 했지만 내가 상상했던 결혼생활은 아니었다. 나와는 너무 다른 남편과의 부딪침 또한 점점 극에 달해 갈 뿐이었다. 이런 게 인생이라면 정말 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마음수련 명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명상을 통해 이 우울함의 원인은 엄마의 죽음 그 이전, 그보다 더 훨씬 이전부터 뿌리 깊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폭력적인 오빠로 인해 불우했던 어린 시절 -

나는 1966년 전라도 광주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아이 셋을 두고 사별하신 아버지가 재혼으로 맞은 두 번째 부인이 나의 엄마다. 아버지의 첫번째 부인은, 오빠를 낳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오빠는 그 충격이 커서인지, 엄마가 없어 마음을 못붙이며 자라서인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 안 가고 걸핏하면 집을 나갔고, 커가면서는 더욱 폭력적이 되었다. 술 먹고 와서 다 때려부수는 건 부지기수였고, 엄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상상을 초월해,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빠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빠가 집에 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조차 제대로 못 쉬었다. 제일 힘들었던 건 엄마가 이 집을 떠나려다가도 당신 자식들 때문에 다시 돌아왔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엄마가 너무도 불쌍하고 그러다가 언젠가는 엄마가 진짜로 사라질까 봐 무서웠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내가 아들인 줄 아셨단다. 오빠가 아들 역할을 못하니 아들을 간절히 바랐다가 낳고 보니 딸이라 실망이 크셨다. 게다가 첫째 언니는 돌 전에 기저귀를 뗐는데 나는 느리고 잘 가리지 못해 야단을 많이 맞았다고 한다. 언니들에 비해 똑똑하고 야무지지 못하다고 비교당하고 야단을 맞아서였을까, 나는 늦게까지 오줌 가리기도 잘 못했다. 밤에 잘 때면 실수할까 봐 겁나고 무서웠고, 자다가는 그 두려움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실례를 했다. 스스로 위축되고 자신감이 없어졌던 것 같다. 한번은 초등학교 가기 전 언니가 공부를 가르쳐줬는데 계속해서 틀리자 그걸 보고 있던 엄마가 심한 말을 했다. 그 순간부터 나 스스로 난 멍청하고 쓸모 없고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린 것 같다. 엄마의 그 부정적인 말들이 바로 내 인생 자체를 지배했다는 것을, 명상을 하며 이해하게 되었다 무엇을 하든 야단맞으면 어떻게 하지,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에 항상 사로잡혀서, 스스로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고 먼저 포기부터 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늘 불안감과 열등감에 휩싸여 있던 나. ‘난 못할 거야’ 하며 늘 위축됐던 내 모습은 그 모든 어린 시절의 기억들로 인해 형성된 나였다.

- 마음 비운 만큼 사라져간 우울과 불안의 뿌리 -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지 못해서 너무도 슬펐던 나, 오빠를 보면 늘 불안하고 무서웠던 마음, 엄마에 대한 원망 그리고 연민. 이 모든 마음들을 열심히 버리고 또 버리고 버렸다. 남들보다 늦어도 좋았다. 남들이 백 걸음 갈 때 나는 한 걸음 가겠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마음수련을 해나갔다. 그 결과 나에게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힘든 마음이 버려질수록 그 마음이 옅어지고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고, 어떻게 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았던 미움과 원망이 떠나고 대신 이해와 미안함이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은 불행하다는 마음에 갇혀 버린 채 그 한과 상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던 오빠. 그때 누구라도 정신적인 치료와 상담을 도와줬더라면 오빠도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사람은 배워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자식 교육을 위해, 매일 서너 시간씩밖에 못 주무실 정도로 생활력이 강하셨던 엄마. 하지만 큰아들 농사를 못 지었다는 죄책감에 늘 시달려야 했었다. 나머지 자식들이 위안이고 자부심이었을 엄마 입장이 되어보니, 그 세월을 지켜주신 엄마가 너무도 고맙고 감사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내가 받고 싶은 걸 주지 않는다고, 엄마한테 또 다른 비수를 꽂으며 살아왔었구나…. 엄마한테 미안했다. 좀 더 노력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열등감 뒤에 숨어 늘 자포자기하고 항상 주변에 바라기만 했던 날들도 떠올랐다.

- 편안해진 엄마 밝게 자란 딸, 마음수련은 최고의 태교 -

결국 나는 어릴 때 사진처럼 찍어 놓은 마음들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그렇게 나만 보호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나만의 마음세계 속에 갇혀 산다는 것이 정말 무서운 것이구나 싶었다.

어떤 마음이든 한 번 그렇게 입력이 되고 나면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 속으로 들어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하지만 그 모든 마음들을 버릴 수만 있다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내 속에 켜켜이 쌓여진 마음들이 깨끗이 비워진다는 것은, 곧 나의 삶이 자유로워지고 행동이 편안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 마음수련을 시작했을 때의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보면 놀랍다고 한다.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하고 사람들하고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나에게서는 옛날의 그 어두웠던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참, 딸아이의 이야기도 해야겠다.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는 자기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가 마음을 비워서인지 참 밝고 씩씩하다. 친구들이나 선생님과의 관계도 좋고 자기 일은 척척 알아서 하니, 마음수련은 정말 최고의 태교이지 않는가.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하지만 자기 마음이 있는 한 행복은 너무나 막연하다. 그 마음이 참으로 내려놓아질 때 찾아지는 것이 진짜 행복이다.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고, 거울 보기를 두렵지 않게 해준 이 마음수련은, 진정한 행복과 자유의 시작이라고.

대인관계

처세술 책 백 권보다 나은 대인관계 노하우(장혜정 / 컴퓨터 프로그래머)

("혜정씨는 인기가 많아서 좋겠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 같애."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는구나 느끼게 되었다. 전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사람은 내가 노력을 해야만 오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도적인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순간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나로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 부담스러운 숙제 같았던 인간관계 -

그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마음수련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남자친구며 여러 인간관계가 생각처럼 되지 않아 힘들 때 마음수련을 하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을까? 20대 후반경에는 아예 그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회사생활 잘하는 방법, 상사한테 인정받는 방법 등등.... 그런 책들에서는 기술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화할 땐 얼마 만에 한 번씩 맞장구를 쳐줘라, 생일을 기억해 놨다가 카드를 보내라 등등의 지침을 챙기기 위해 더 분주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인간관계가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예전엔 사람들 사이엔 의무 같은 게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라면, 선배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런 기준을 까다롭게 적용시키다 보니 상대도 부담스러워했다. 누구와도 안전된 관계는 이어지질 않았고, 나는 조급했다. 인간관계란 내가 뭔가를 끊임없이 해야 유지되는 부담스런 숙제 같았다.

- 인간관계 잘하는 방법, 그 열쇠를 찾다 -

수련을 하면서 내가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어떤 요령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인지도 알았다. 모든 인연은 다 순리대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인데, 모두 다 내 기준에 맞추려고 억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주위 사람들도 변화된 나에 대해 호감과 신뢰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마음수련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알게 됐다. 상대에 대한 마음이 없으면 된다. 상대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없고,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내 입장에서 시시비비를 안 하면 정말 편안하게 대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을 못하고 산다.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려주기가 어렵다. 처세술 100권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간단한 일, 인간관계를 여는 간단한 열쇠 하나가 내 입장을 버리고 세상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나를 버리면 누구에게나 맞는 만능 열쇠가 되어버린다.


마음수련 교원직무연수 후 변화된 대인관계 (강윤숙 / 교사)

-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았던 나 -

나 혼자만 잘나, 친구들도 무시했었다. 그래서인지 친구가 많지 않았다. 친구들도 착한 얼굴로 앉아 속으로는 자신을 무시하던 나의 마음을 알았나 보다. 사실 자라면서 어른들에게 칭찬받고, 선생님께 칭찬받고, 부모님에게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던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줄 알았다.

대학 때도 친구들보다 더 인생을 깊이 있게 살고 있고, 진실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중학교 선생님이 되어서도 그랬다. 다른 선생님들은 내가 생각하는 ‘바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더욱 나와 성향이 다른 선생님들과 마찰이 많았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항상 그분들은 불편해했고, 서로 불만이 많다는 걸 느꼈다. 학생들이 내 진실된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원망스러웠다.

항상 잘났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던 나였기에 결혼생활도 무척 힘들었다. 나에게 부조리한 많은 걸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어머니와 나와 진실된 삶을, 평등한 삶을 살자고 약속했던 남편이 그 언저리에 가지도, 가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여 짜증 났다. 짜증은 우리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어느 날 “엄마, 나에게 소리 지르지 마. 무서워!”라고 큰딸이 하소연했다.

- 마음 버리자 비로소 보인 남편, 시어머니의 원래 모습 -

동료 교사의 소개로 마음수련 교원직무연수를 했다. 여러 날, 내 인생,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깊은 반성의 눈물을 흘렸다. 내 마음과 씨름하면서, 그 마음들을 하나씩 하나씩 버려나갔다. 그러면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 가족, 남편, 딸들, 시댁 식구들, 친구들, 학생들, 선생님들에게 정말 ‘잘못했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마음수련 교원직무연수를 한 후 사람들과의 부딪침이 점점 줄었다. 매일 저녁, 그날의 나를 돌아보면서 마음을 버렸다. 지금은 매 순간 그 마음들을 버린다. 어느 사이엔가 산다는 것이, 인생이 너무나 즐겁고 기뻤다. 집에서 가족들과 있으면 가족들과 있어서 행복하고 좋다. 학교에 오면 학생들과 선생님들과 얘기하고 떠들며 하루가 즐겁다.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들었나 생각해 봤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에 대한 ‘바람’이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학생들에게, 주위 선생님들에게 바라는 것이 많았다. 다 내 입장에서 좋은 것,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버리고 본 남편은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입장보다 나를 더 생각해 주는 정말 ‘착한 남편’이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고생하지 않도록 자신이 대부분을 희생하시는 헌신적인 분이셨다. 아이들은 내 인생의 행복함을 같이 즐기라고 하늘이 보내준 동락자(同樂者)였다. 더 이상 내가 옳은 것을 교육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 내가 달라진 걸까? 아이들이 달라진 걸까? -

예전엔 학년 부장님과 자주 부딪쳤다. 교육적이지 않은 많은 것들을 나에게 강요한다고 여겼다. 주위 선생님들도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가 없이 불편했다. 지금 나는 학교에서 만나는 모든 선생님들의 팬이다. 참 열심히 살며 교육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럽다. 그 선생님들과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지내는 시간이 마냥 즐겁다.

중학교 1학년 아침 독서시간. 책을 읽다가 아이들을 바라봤다. 이 아이들은 참으로 마음을 잘 연다. 내가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면 나를 향해 마음을 활짝 열고 기다린다. 그리고는 곧 나와 친구가 된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워주길 바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예전에 나는 학생의 장점보다 단점을 훨씬 많이 알고 있는 교사였다. 내 교실에는 장점이라고는 눈 씻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학생들만 있었다. 내가 달라진 걸까, 학생들이 달라진 걸까. 답은 너무나 분명했다.

난 지금 단점보다 장점을 훨씬 많이 가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이렇게 많은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게 됐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원래부터 아름다운 인연으로 내 옆에 있었다. 그것을 알게 해준 마음수련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