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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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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총체적인 이미지이다. 사고나 감정, 의지 등의 여러 작용 주관자로서 여러 작용에 수반하고 이를 통일하는 주체이다. 즉, 아자는 한 개인이 자기라고 의식하는 모든 것이므로 지적, 신체적, 성취, 특정 등을 포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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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총체적인 이미지이다. 사고나 감정, 의지 등의 여러 작용 주관자로서 여러 작용에 수반하고 이를 통일하는 주체이다. 즉, 자아는 한 개인이 자기라고 의식하는 모든 것이므로 지적, 신체적, 성취, 특정 등을 포함하게 된다.
  
 
사고, 감정, 의지 등의 여러 작용의 주관자로서 이 여러 작용에 수반하고, 또한 이를 통일하는 주체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때그때의 사고,감정, 의지의 각 작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성과 동일성을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자아의 구체적 내용은 그때그때의 각 작용의 내용과 관계없는 것은 아니며, 그것들에 반성의 눈을 돌림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자아란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철학상 자아의 자각은 '너 자신을 알라'를 가르친 소크라테스에게서 비롯되는데, 자아의 문제가 철학의 주제로 된 것은 인간의 주체성이 확립되는 근세 이후의 일이다. R.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sum)'라는 명제에 의하여 '생각하는 나'를 정신이라 부르고, 이를 항상적 실체로서 확립했으나, D.흄 등의 영국 경험론은 그때그때의 감각,감정을 떠나서 자아는 없고 그것들의 총체가 바로 자아일 따름이라고 하여 자아의 정신적 실체성을 부인하였다. 이리하여 자아의 정신적 실체성을 주장하는 합리론의 입장과, 그것의 감각적 다양성을 주장하는 경험론의 입장이 서로 대립하는데, 이것에 인식론의 관점에서 해결을 부여한 것이 칸트이다. 칸트는 자아의 실체성은 이를 부인하지만, 그러나 인식의 가능성의 근거는 경험적 자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적 표상(表象)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지 않으면 안되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통각, 즉 선험적 자아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독일 관념론의 J.G. 피히테는 이 선험적 자아를 형이상학적으로 절대화하여 전실재(全實在)를 포괄하는 절대적 자아를 구상하였다.
 
사고, 감정, 의지 등의 여러 작용의 주관자로서 이 여러 작용에 수반하고, 또한 이를 통일하는 주체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때그때의 사고,감정, 의지의 각 작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성과 동일성을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자아의 구체적 내용은 그때그때의 각 작용의 내용과 관계없는 것은 아니며, 그것들에 반성의 눈을 돌림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자아란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철학상 자아의 자각은 '너 자신을 알라'를 가르친 소크라테스에게서 비롯되는데, 자아의 문제가 철학의 주제로 된 것은 인간의 주체성이 확립되는 근세 이후의 일이다. R.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sum)'라는 명제에 의하여 '생각하는 나'를 정신이라 부르고, 이를 항상적 실체로서 확립했으나, D.흄 등의 영국 경험론은 그때그때의 감각,감정을 떠나서 자아는 없고 그것들의 총체가 바로 자아일 따름이라고 하여 자아의 정신적 실체성을 부인하였다. 이리하여 자아의 정신적 실체성을 주장하는 합리론의 입장과, 그것의 감각적 다양성을 주장하는 경험론의 입장이 서로 대립하는데, 이것에 인식론의 관점에서 해결을 부여한 것이 칸트이다. 칸트는 자아의 실체성은 이를 부인하지만, 그러나 인식의 가능성의 근거는 경험적 자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적 표상(表象)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지 않으면 안되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통각, 즉 선험적 자아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독일 관념론의 J.G. 피히테는 이 선험적 자아를 형이상학적으로 절대화하여 전실재(全實在)를 포괄하는 절대적 자아를 구상하였다.

2022년 3월 12일 (토) 21:10 판

개요

자아

자아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총체적인 이미지이다. 사고나 감정, 의지 등의 여러 작용 주관자로서 여러 작용에 수반하고 이를 통일하는 주체이다. 즉, 자아는 한 개인이 자기라고 의식하는 모든 것이므로 지적, 신체적, 성취, 특정 등을 포함하게 된다.

사고, 감정, 의지 등의 여러 작용의 주관자로서 이 여러 작용에 수반하고, 또한 이를 통일하는 주체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때그때의 사고,감정, 의지의 각 작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성과 동일성을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자아의 구체적 내용은 그때그때의 각 작용의 내용과 관계없는 것은 아니며, 그것들에 반성의 눈을 돌림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자아란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철학상 자아의 자각은 '너 자신을 알라'를 가르친 소크라테스에게서 비롯되는데, 자아의 문제가 철학의 주제로 된 것은 인간의 주체성이 확립되는 근세 이후의 일이다. R.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sum)'라는 명제에 의하여 '생각하는 나'를 정신이라 부르고, 이를 항상적 실체로서 확립했으나, D.흄 등의 영국 경험론은 그때그때의 감각,감정을 떠나서 자아는 없고 그것들의 총체가 바로 자아일 따름이라고 하여 자아의 정신적 실체성을 부인하였다. 이리하여 자아의 정신적 실체성을 주장하는 합리론의 입장과, 그것의 감각적 다양성을 주장하는 경험론의 입장이 서로 대립하는데, 이것에 인식론의 관점에서 해결을 부여한 것이 칸트이다. 칸트는 자아의 실체성은 이를 부인하지만, 그러나 인식의 가능성의 근거는 경험적 자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적 표상(表象)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지 않으면 안되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통각, 즉 선험적 자아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독일 관념론의 J.G. 피히테는 이 선험적 자아를 형이상학적으로 절대화하여 전실재(全實在)를 포괄하는 절대적 자아를 구상하였다.

자아성장 프로그램 (미술)

미술활동을 통한 자아성장 프로그램은 감정이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이완과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시간을 갖게 된다.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나 생각들을 미술 표현을 통해 감정의 정화를 경험하며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자아성장을 촉진하게 된다. 또한 집단 구성원들간의 서로 지지하고 이해하면서 서로 배려하는 마음도 배우게 된다.

자아성장의 중요성
자아는 아이들이 성장하고 발달하는데 있어 특징을 보이게 된다. 올바른 길로 자아가 형성되고 성장해야만 더욱더 긍정적인 미래를 비출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자아는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발달, 주변 환경과 타인에 영향을 받으며 함께 성장하고 확립되어 간다. 올바른 자아를 형성하여야 그러한 자아에 대한 존중감도 확립할 수 있다. 이렇게 자아성장 프로그램은 참된 자기 발견과 타인을 존중하면서 함께 마음을 성장시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