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번째 줄: | 51번째 줄: | ||
- 죽음의 경험이 심어준 삶의 지혜 - | - 죽음의 경험이 심어준 삶의 지혜 - | ||
+ | |||
+ | 한마디로 참 평탄한 삶이었다. 스스로 한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하고자 하는 일에 어떤 장애가 닥쳤다며 | ||
+ | 좌절한 적도 없으니 |
2019년 3월 6일 (수) 11:30 판
1. 마음 없이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
(오세천,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내가 너를 보면 무섭다....."
초등학교 때였다. 육이오 전쟁 중이었지만 소를 몰고 온 들판을 다니며 풀을 먹이고 들어오는 나에게 ,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이후에도 어머니는 종종 '내가 너를 보면 덜컥 겁이 난다'고 하셨다
어린아이가 그 힘든 농사일을 너무 악착같이 하니, 놀랍고 기특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아니 뱃속에 있을 때 지우려고 약까지 먹었는데, 끈질긴 생명력으로 태어난 아이가 누구도 안 하려 하는 힘든 일들을 하니, 안쓰럽고 미안해서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
9남매 중에 일곱 번째로 태어났기에, "내가 너를 지우려고 약을 먹었었다'는 말씀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흘려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잠재의식 깊이에는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게 자리 잡혀서였을까. 생존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커서였을까.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아니 열심히 살아졌다.
- 내가 사는 것인가, 저절로 살아지는 것인가 -
우리 집은 집터만 400평이 넘는, 여러 소작농까지 둔 부유한 농가였다. 해방 후 바로 내가 8세 때 사회주의가 들어오면서 토지개혁이 일어나 소작농지를 다 분배해야 했지만 우리가 직접 짓는 땅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에 일본 메이지대에서 유학을 할 정도로 식자였던 아버지, 부유한 농가에서 귀하게 자란 형과 누나들은 농사일을 힘들어했다.
그 많은 일들을 힘들다는 생각도 없이 한 것은 나였다. 아직 어리니 일을 안 한들 뭐라 할 사람도 없었건만,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이 저절로 눈이 떠지고 몸이 움직여졌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2~3분 거리에 있는 교회에 가서 종을 치고, 들에 나가 일을 하다가 학교에 가고, 학교에 다녀와서 또 일을 했다. 부지런히 열심히 사는 것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내가 손대는 일은 이상하게 다 잘되고, 내가 하는 농사는 언제나 남들보다 몇 배의 수확을 거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육이오 사변으로 마을에 폭탄이 많이 떨어져 마을 곳곳이 폐허가 되고 고철들이 생겼다. 그게 돈이 될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나는 고철이 보이면 새끼줄로 묶어 집으로 끌고 와서 마당 한쪽에 쌓아놓았다.
그것이 중학교 1학년 때의 일, 이후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에는 가격이 많이 올라서 큰 도움이 됐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당시 특수농작물이었던 담배농사를 지어 고수익을 냈고, 담배농사 이후에는 고구마농사로 전환하여 또 많은 수익을 올렸다. 건강하고 힘이 좋아서 그 무거운 고구마 자루를 혼자 거뜬히 수레에 옮겨 싣고 나가 가게에 팔기도 했다. 중학생이 뭘 알아서 그랬겠는가. 이렇게 하면 돈을 벌 거야 하는, 어떤 계산도 없이 그저 열심히 움직이고 나면 그것이 필요한 등록금이 되고 생활비가 된 것이다.
원하던 대학의 토목학과에도 무난히 들어가고, 그 어렵다는 기술사 시험에도 한번에 합격했다. 이후 건설공무원을 하면서 우수공무원으로 인정받다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나이 서른에 꾸린 가정도 성공이었다. 중매로 만난 아내는 일본 문화목장학원에 유학 중인 미모의 재원이었다. 결혼 후 아내는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함께 1남 2녀를 키우면서 큰소리 한번 나는 일 없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 아이들 역시 엇나가지 않고 반듯하게 잘 자라주었다.
- 죽음의 경험이 심어준 삶의 지혜 -
한마디로 참 평탄한 삶이었다. 스스로 한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하고자 하는 일에 어떤 장애가 닥쳤다며 좌절한 적도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