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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남편이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이야기하지만, 나한텐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 가끔 남편이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이야기하지만, 나한텐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 ||
− | 요즘 나의 삶은 마치 꽃봉오리들이 만개한 것 같다. 정말 모든 | + | 요즘 나의 삶은 마치 꽃봉오리들이 만개한 것 같다. 정말 모든 사람들이 마음수련을 했으면 좋겠다. 누구나 살면서 아주 힘든 순간이 있을 것이고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는지 모르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마음수련은, 내게 해주었듯이 당신을 위해 그곳에 있을 것이다. |
− |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는지 모르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마음수련은, 내게 해주었듯이 당신을 위해 그곳에 있을 것이다. | ||
2022년 2월 21일 (월) 19:10 판
개요
마음이 더 여유로워졌다, 들끓던 잡생각이 끊겼다, 직장 스트레스가 없어졌다, 대인관계가 편안해졌다, 나를 알게 됐다, 불면증이 해결됐다, 아이들 남편과 마주 보고 웃는 날이 많아졌다… 그분들이 느끼고 있는 효과는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나를 돌아보고 마음을 비우는 시간을 갖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차츰차츰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명상이 있습니다만, 마음수련은 오직 마음에만 집중한 마음 전문 명상입니다. 일주일만 경험해도 참가자들에게 많은 효과를 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족,부부관계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결혼 30년 차 신혼부부정기언(수원여대 총장), 서희순 부부
결혼한 지 30여 년, 하지만 이들 부부는 아직 신혼이라 말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며 집안일, 자녀 얘기, 하루 일상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부부. 아내는 “30년 넘게 결혼생활을 하면서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교육행정가로서, 대통령 교육비서관과 교육부 차관보를 지낸 남편은 공무원들 사이에 ‘온화한 카리스마’로 잘 알려져 있다. 업무에서는 늘 대화와 설득으로 합리적인 조정을 해온 것, 하지만 가정에서는 ‘카리스마’에 더 비중이 실렸던가, 금슬 좋은 이 부부에게도 마음의 간격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정총장이 마음수련을 하면서 그 간격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 평생 처음으로 “미안하다, 고맙다” 말한 남편 -
“조선시대 갓 쓰고 팔자걸음 하던 양반이 21세기에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은 사람이었어요. 아주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었죠. 농담이나 실없는 소리를 해 본 적이 없어요. 빈틈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죠.” 부부간의 대화 시작하는 모습(핸드폰) 아내 서씨는 그런 남편이 참 어려웠다.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거나 주사를 부리는 일도 없고, 실수하는 일도 없었다.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남편의 모습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남편으로서는 서운한 점이 많았다. 결혼한 이후 줄곧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직장생활 하랴, 살림하랴, 집안일이며, 아이들 문제며, 남편과 의논하고 싶고, 때로는 하소연하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말을 끊어버렸다.
“뭐 어떻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얘기 좀 들어달라고 한 건데, 결론도 없는 말을 해서 뭐 하냐, 시어머니한테 불만이 있으면 직접 얘기해라, 이런 식이었어요.” 그렇게 번번이 면박을 당한 후로 아내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점점 대화가 단절되어갔다. 함께 직장생활을 하니 서로 얼굴 마주보며 대화를 나눌 시간도 거의 없었지만 시간보다는 할말이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그랬던 부부가 요즘은 시시콜콜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 정기언씨가 마음수련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2002년인가, 여름휴가 때 남편이 일주일간 수련을 하고 와서는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고, 고맙다고 말하는 거예요. 평생 처음 그런 말을 들었죠. 감동스러웠어요.” 옆에서 미소 지으며 듣고 있던 정기언씨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그 말만 했나, 사랑한다고도 했지.”
아내는 “신혼 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다 늙어서 넘치도록 듣는다”며 웃는다. 정기언씨는 “자라오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잠재의식 속에 단단한 고정관념이 되어 자신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음수련을 하면서 알게 됐다”고 한다.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엄격한 집안이었어요. 어려서부터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죠.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 우선이었고, 아들이 우선이었어요. 제가 자라서는 아들도 어려워하실 정도였어요. 여자라면 남자가 하는 일에 순종해야 되고, 시부모 모시고 살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집안일은 전부 아내의 몫이라는 사실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도, 잘못됐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죠.”
- 고정관념과 생각 버리니 상대 입장 보여 -
그 모든 고정관념과 생각들을 다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아내 입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만 옳은 줄 알고 자신의 생각과 입장만 강요하면서 아내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절절히 깨달아지면서 진심으로 참회가 됐다. “똑같이 직장생활 하면서, 나는 집에 오면 꼼짝도 안 하는데 아내 혼자 온갖 집안일을 다 해온 거죠. 남편이라는 사람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힘들다 말하면 면박만 주고, 가장 가깝다는 배우자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게 했으니, 몸도 약한 사람이 의지할 데도 없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까 너무 잘못했고 미안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시키기만 하던 그가 요즘은 설거지, 청소는 기본이다. 항상 근엄하게 굳어 있던 얼굴도 ‘못난이 인형’처럼 웃는 얼굴로 변했다. 그가 이렇게 변한 것을 누구보다 좋아한 건 아이들이었다. 엄하고 무섭기만 하던 아빠가 농담하고 장난치는 모습에 아이들이 너무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사실 아내나 아이들이 원한 건 이야기 들어주는 거, 따뜻한 말 한마디, 손 한번 잡아주는, 아주 사소한 것들인데 전에는 그걸 몰랐어요. 그저 내가 바르게 성실하게 살고 열심히 일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지위가 올라가면 가족들에게 다한 거 아니냐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던 거죠.”
마음수련으로 잃었던 가족을 되찾았다는 정기언씨. 집안의 가장으로 항상 군림하려 했고, 자기 입장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만 가족들에게 요구했던 그였지만 요즘은 저절로 아내나 아이들이 뭐가 필요할까, 도와줄 게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단다. 고정관념이나 의무감, 체면, 격식 따위를 다 버리고 나니 가족관계뿐만 아니라 직장생활도 편해지고 몸이 날듯이 가벼워졌다는 정기언씨는 아내에게도 마음수련을 권했다.
“사실은 남편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게 옛날부터 있었거든요. 그래서 남편이 권하는 건 하기 싫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마음수련하고 완전히 변했잖아요. 저 사람이 이 정도로 변했다면 마음수련에 뭔가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죠.” 서희순씨는 시간을 쪼개어 마음수련 교원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수련을 하고 보니까 항상 남편에게만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입장만 고수한다고 했는데, 나도 마찬가지였더라구요. 나도 내 입장에서만 판단하고 분별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런 나를 버리니 남편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됐고 누구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마음수련 안 했으면 ‘황혼 이혼’ 당했을 것 “전에는 피곤한 몸으로 퇴근하면 집안 분위기가 냉랭했어요. 아이들은 거실에 있다가도 내가 오면 인사만 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려요. 옆에 있는 아내도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있는 것 같고…. 막연히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가 잘못됐는지 몰랐었죠. 내 잘못인 줄도 모르고 가족들한테 화를 내곤 했어요. 나중에 아내가 하는 말이 나에 대해서는 완전히 포기하고 애들만 보고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대로 갔으면 아마 황혼 이혼 당했을지도 모릅니다.”(웃음) 그런 남편을 보며 서희순씨는 웃으며 말한다.
“이혼까지는 아니더라도 굉장히 삭막한 생활을 이어갔겠죠. 지금도 바쁜 것도 그대로 바쁘고 서로 시간이 없기는 마찬가지죠. 그렇지만 마음이 달라지니까, 저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나를 정말 생각해주는구나 그런 믿음이 생기니까 삶 자체가 완전히 바뀐 거예요. 저희 부부에게는 마음수련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셈입니다.” 마음수련 후 비로소 부부 사이에 삶의 동반자, 평생 반려자로서 진정한 신뢰를 갖게 됐다는 정기언씨는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부부에게 ‘언더스탠딩(understanding)’이라는 말의 의미를 짚어주고 싶다고 한다.
“이해한다는 단어를 보면 아래에[under] 선다[standing]는 뜻이잖아요. 상대보다 아래에 서는 낮은 마음이 되어야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가부장적인 위계의식을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아내를 이해할 수 있었죠. 낮은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를 다 버려야만 합니다.” 나를 버리고 낮은 마음이 되어야 감사와 행복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는 두 사람. 곁에 있어줘서 너무 감사하다며 손을 맞잡고 웃는 중년의 부부, 신혼처럼 달달하다.
(정 기 언 님은 1954년 전남 진도 출생으로 서울중앙고와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미국 아이오와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교육행정 전공)를 받았다. 제19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한 뒤 교육부 국제교육협력관과 서울대 사무국장을 지냈다. 대통령 교육비서관에 이어 교육인적자원부 차관보, 서울특별시 부교육감을 역임했으며 2006년 7월부터 동신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수원여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EBS교육방송 이사와 전인교육학회 부회장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서 희 순 님은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전여고와 성균관대를 졸업, 서울시립대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교사, 교감직을 역임하며 교직원으로서 재직 중이다. 1983년 정기언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교원 연수 프로그램으로 마음수련을 경험하기도 했다.)
우울증 극복한 나는 행복한 엄마, 아내입니다(김지영 / 주부)
이마와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과 무표정한 얼굴. 어느 때부터인가 거울을 마주하는 게 싫었습니다. 무뚝뚝해지고 강퍅해지는 내 모습을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나이 들수록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억센 아줌마일 뿐이었습니다.
- 참고 인내해야 했던 결혼생활, 외로움과 우울함만 남아 -
20년 전, 결혼했습니다. 독신으로 살고 싶은 마음도 접게 한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로 시작한 결혼 생활. 자유를 포기한 만큼 가정을 일구며 더 큰 걸 얻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참고 인내해야 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느라 내 삶은 온데간데 없어진 것 같았고, 직장 일로 바쁜 남편을 볼 때면 ‘나를 잊어버렸구나…’하는 생각에 외로웠습니다.
어느 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을 아빠한테 맡긴 채 떠난 하루 동안의 기차 여행. 혼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부산의 광안리 바닷가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발 디딘 곳만 달라졌을 뿐 내 마음은 그대로였으니까요. 돌아가면서도 마음은 집안 걱정으로 가득했고, 더욱 우울해졌습니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나의 근심은 더해졌습니다. 채권자들에게 시달리기도 하고, 생활비 없이 지내는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뒷바라지 못해주는 게 미안했고, 경쟁 사회에서 뒤처질까 불안했습니다.
- 총성 없는 전쟁터 같은 곳 떠나 갖게 된 잠시의 휴식 -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나날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아이들에게서 남편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칠 때면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러냐”며 아이들을 닦달했습니다. 큰아이가 “엄마, 왜 그래~” 하며 울부짖었고, 나는 멈칫했습니다. ‘정말 내가 왜 이러지?’ 하지만 그것도 순간뿐 어찌할 수 없이 반복되는 상황들. 마치 내 마음은 촘촘한 체가 되어버린 듯 남편이나 아이들의 모습, 말 한마디도 그냥 흘려보내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엄마가 없는 게 행복해” 하던 아이의 상처 어린 말들, 그 말을 들은 게 억울해서 또다시 남편에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집안은 총성 없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논산에 있다는 마음수련 메인센터로 떠났습니다. 평소에는 생각해볼 수도 없는 한 달간의 긴 여행이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는 뭔가 해결되지 못하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절박한 만큼 집중해서 수련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니 우리 부부는 한 공간에 있어도, 한순간도 같이 산 적이 없었더군요. 나는 과거에 살고, 남편은 미래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각자의 기나긴 평행선을 향해 달려갈 뿐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연애 시절 남편이 나에게 보여줬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달라진 남편을 보며 외로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반면, 남편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잘해주고 싶은 마음에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지나고 없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는 미래를 들고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사이에 교차점은 없었습니다.
- 과거에 살던 아내와 미래에 살던 남편, 드디어 같은 세상을 살다 -
남편만 보면 원망스럽고 불안하고, 남편 역시 믿어주지 않는 아내를 답답해했습니다. 내게 가족은 나의 바람과 기대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정말 참으로 가족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을 때…. 눈물이 쏟아졌고, 그 순간 소외된 엄마, 소외된 주부, 소외된 아내라는 우울한 마음도 함께 녹아내렸습니다.
내 한과 내 욕심과 내 집착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향해 꽁꽁 묶어놨던 줄들을 하나하나 풀어내자, 비로소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 준 남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잘 커준 아이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거센 파도처럼 일렁거리던 내 마음도 점차 잔잔해지고, 평온함이 찾아왔습니다. 남편도 함께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고, 우리 부부는 이제야 같이 사는 기분입니다.
남편이 말합니다. “당신 덕분에 마음공부도 하고 이렇게 한마음으로 살게 돼서 너무 감사하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남편이 참 고마웠습니다. 아이가 무릎 위에 누워 살갑게 얼굴을 비비고, 집으로 들어오는 남편을 반갑게 맞이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그 일상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비운 만큼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거울을 봅니다. 40대 중반의 한 아줌마가 활짝 웃습니다. 세월에 따라 저절로 생겨나는 주름도 예쁘게만 보입니다. 부족하다고 슬프지도, 넘친다고 자랑할 것도 없이 주어진 조건과 세상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래서 나는 행복한 엄마, 아내입니다.
건강
비로소 마음이 쉽니다 (구선애 / 서울 동작구)
마음수련을 하기 전, 겁이 많은 저에게는 수많은 처음을 마주한다는 것이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제와 다시 접한 이 시는 설렘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남편과 딸의 권유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수련이 가져다준 그 기적 같은 선물을 안고, 오늘도 나는 입원 중이신 어머님을 뵌 후, 마음수련 센터로 향합니다.
- 몸만큼 아팠던 내 마음을 돌아보다 -
연로하신 시어머님이 병상침대에서 보내는 외로운 긴 투병과 팔십 평생의 기억. 그 번뇌와 수만 가지 생각으로 인해 편히 쉬지 못하시는 괴로움을 보면서, 이 명상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님의 모습이 바로 미래의 내 모습이었겠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더해지는 마음과 유한한 물질의 몸으로 하루하루 더 쇠약해짐이고 병듦이고 결국엔 소멸되어지는 허무한 마무리였을 텐데, 명상을 한 후로는 언제나 처음 맞는 새날이고 시작만이 있는 삶이 되다니…. 이렇듯 지나간 날도 없고 앞으로 올 날도 없이 지금 현재를 살 수 있다는 것을, 불과 2년 전만 해도 알지 못했습니다.
신앙과 다른 길일까 봐 처음부터 마음수련이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오랜 기간 몸이 아팠기에 뭔가를 시작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고 귀찮기도 했습니다. 그저 오십 줄에 들어서면서 내가 어떻게 살았나 산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너무나 의미 있었다는 남편 말과, 명상을 통해 달라진 딸의 모습에, 그렇게 난생처음 ‘나’라는 사람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사람의 심리작용이 어린 날부터 한평생 어떻게 움직여 가는지를, 현재 나의 상태는 그런 기억들의 결과물이란 것을, 얼마나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던지 처음 접하는 내용도 놀라웠지만, 그 ‘나’가 누구인지를 처음 안 순간의 놀라움이란 뭐라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병명도 모르는 채 암 병동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고통스러웠던 온몸의 통증들. 뼈들이 굳었고 휘었고 굽어진 채로 사는 동안 그 병증은, 마음과는 상관없는 과도한 일들과 잘못된 수술 탓으로만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수련을 하며 알게 된 것은, 나의 몸만이 굽고 휘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쓰고 있었던 마음들의 모양새가 바로 그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 인정과 칭찬에 집착하면서 무엇이든 너무나 열심히 했었던 나-
오래 투병하면서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나 혼자 만들어놓은 내 마음속 책임과 의무의 나라에서 위축과 자책으로 온갖 짐을 지고 가던 나. 몸에 대한 염려와 애탐으로 과거와 미래를 들락거리느라 단 한 번도 현재에 있어보지 못했던 나. 길가에 핀 들꽃은 담장 너머 멋진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고 하늘을 나는 새나 산속 토끼는 오늘 뭘 할지 내일은 또 뭘 할지 고민 없이 그냥 사는데 매순간을 그냥 살지 못했던 나. 온갖 시비와 틀 잣대 기준들이 너무 많아서 딸을 힘들게 하고 스스로도 고단했던 나.
나를 돌아보는 일은 시한부 인생의 영화를 보듯이 괴롭고 아팠지만 그게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는 게 얼마나 큰 희망이었는지…. 모든 게 내 마음세계에 찍어놓은 사진과 같은 것이었고, 그것들은 마음빼기 방법에 의해 시원하게 버려졌습니다. 그렇게 우주인 본래의 나를 확인해가던 모든 순간순간은 지금도 가슴 뛰는 경이로움입니다.
내 몸 내 마음이 나라고 굳게 믿으며 살았던 그 익숙한 것들을 버리는 이별이 결코 쉬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소중했던 시간이었고 가짜를 버리는 이별 안에서 드러나는 진짜와의 만남은 너무나 자유로웠고 더없이 평화로웠습니다.
- 비로소 마음이 쉽니다…-
했다 하는 열심히 한 내가 없어서 결과가 더 좋았고, 책임과 의무의 짐에서 벗어나니 할 수 있는 것만 기쁘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병에 대한 걱정도 없고 힘들다 하는 마음을 버리니 더 건강해졌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을 떠다니는 번뇌와 생각들이 없으니 저절로 집중력이 생겼고, 시비 잣대 틀을 벗으니 세상이 있는 그대로 보였습니다.
특히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치 못해서, 거슬리던 소란한 소리가 사라지고 따뜻하고 조용한 대화만 남으니 그 행복한 소통과 수많은 변화들이 꿈만 같습니다.
숱한 가짐과 바람들을 풍선 놓듯이 놓아버리니 얼마나 홀가분하던지 그건 잃음이 아니라 하늘을 얻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저 몸 건강해지고 아무 어려움 없이 힘든 삶에서 편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태어난 목적과 이유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고도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마음의 평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이 아니고 일체의 내 마음이 없을 때이며, 한량없는 자유로움이란 언제 어느 때고 어디를 갈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이 쉬는 때입니다. 모두가 그토록 원하는 명예와 성공은 쉼 없이 애만 쓰는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마음수련을 마침으로써 저절로 내 마음에서 얻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지내던 시간에서 휠체어로, 목발로, 마침내 두발로 서고 먼 나라 미국 하늘을 날며 여행을 하기까지, 정말 뜨겁고도 먼 시간을 돌아 돌아 마침내 여기 있음이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그동안 항상 격려와 지지를 해주셨던 양가 부모님, 우리 가족 그리고 걸음걸음 부축해주고 이끌어주고 도와주셨던 사랑하는 수많은 인연들에게 너무나 감사합니다.
갑상선암, 고비 넘기고 진짜 삶 살다 (김영애 / 보건교사)
‘마음을 지우는 지우개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그리고 과거, 나를 아는 사람들 모두를 다 지우고 싶다.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닥쳤을까. 너무 자만해서일까. 괜찮다고, 좋아질 거라고,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기도한다. 하지만 한순간 물밀듯이 차고 올라오는 슬픔과 분노들이 나를 참 많이 힘들게 한다. 내 마음인데도 왜 내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지. 사람이 이렇게 살려고 태어난 건 아닐 텐데,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뭐 어때? 더 큰 병도 있는데…’ 괜찮은 척하지만 마음은 지옥- 2005년 초, 내가 쓴 일기의 내용이다. 당시 나는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 성대까지 잘라내는 큰 수술을 한 상태였다. 매일매일 우울하고 땅속 깊숙이 꺼져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주변에서 걱정하며 챙겨주는 모습조차 다 가식적으로 보였다. 내 자존심에, 힘든 내 마음을 들키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는 밝은 척했다. “뭐 어때, 더 큰 병도 있는데…. 괜찮아 나는 아무렇지 않아….” 하지만 이렇게 나 자신을 속이는 동안 마음은 점점 시커멓게 변해갔다.
수술 후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학교생활을 했지만, 나는 결국 병가를 냈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바로 이게 지옥이구나, 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있구나, 뼈저리게 느꼈다. 정말 이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마음을 비울 수 있다더라”며 마음수련을 이야기해주었다. 마음을 비울 수 있다고? 이곳에 가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수련을 시작했다.
- 열등감 숨기기 위해 행복한 척 포장했던 삶 - 나는 언니와 남동생,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참 평범하게 살았다. 운도 잘 따라줘서, 1998년 IMF라 모두 취업하기 어려울 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보건교사 발령을 받았다. 항상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졌고, 나름 잘났다는 마음이 많았다. 그런데 서른 살이 될 무렵 몸이 점점 피곤해지고 목이 붓더니, 갑상선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수술 후, 점차 목소리가 돌아오고 회복될 거라 했지만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작고 낮은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갑상선 기능 저하가 오면서 몸은 계속 피곤하고 부어 있었고, 70kg이 넘게 살이 쪘다. 이대로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계속 살이 찐다면…, 불안하고 또 불안하고, 모든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행복을 도둑당한 기분이었다.
수련을 하며 나는 처음으로 내 모습과 솔직하게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았다. 빙산 덩어리 같은 열등감이 내 내면을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그 열등감을 들키지 않기 위해 행복하게 보여야 했고, 성격 좋은 척했고, 다른 사람이 나를 부러워하길 바랐다.
열등감의 원인이 된 사진들이 떠올랐다. 제일 먼저 열등감을 느끼게 한 건 언니였다. 언니는 예쁘고 똑똑한 데다, 집안의 첫아이라 되게 많이 사랑을 받았다. 둘째로는 아들을 원했는데, 그게 나였다고 한다. 나를 낳고 바로 아빠가 술 마시러 갔다는 이야기를 할머니께 들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작은 교실에 앉아, 공부를 진짜 열심히 잘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장면도 뚜렷이 떠올랐다. 그래야 부모님께 사랑받을 수 있고, 주변에 인정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매순간이 그랬다.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해하고, 내 자신, 내 부모, 내 학벌. 모든 것에 열등감을 갖고 살았으면서도, 항상 나를 포장하며 살고 있었다.
- 세포 구석구석, 묵은 때처럼 끼어 있는 마음 버려 - 카멜레온처럼 언제나 달라졌던 내 모습, 싫어도 좋은 척, 안 부러운 척, 긍정적인 척… 척….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양파 껍질 같은 탈을 쓰고 모든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내 자신에게조차 솔직한 적이 없었고, 그저 어떡하면 나를 드러낼까만을 생각했던 삶, 이렇게 온갖 욕심과 집착의 마음을 쌓아놓고 살았으니,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참 많이 울었다. 몸에 잘못했고, 가족에게 잘못했고, 주변 모든 사람들한테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열등감, 자존심, 자만심, 체면, 두려움… 세포 구석구석에 나를 지배하는 묵은 때가 끼어 있다고 생각하니 그 마음을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마음이 보이지 않는 감옥이었고, 이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계속 이 마음들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버리고 또 버릴 때였다. 어느 날 갑자기 목 안 깊숙이에서 뭔가가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항상 가슴을 누르고 있던 돌덩어리 같은 것이 꿈틀거리며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온몸을 막고 있던 기혈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낮은 ‘솔’ 음 이상 나오지 않던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아아… 소리도 질러보고, 이게 내 목소리인가 몇 번을 확인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들리지 않던 목소리였는데. 이제 드디어 목소리를 찾았구나~!
살도 점차 빠지고, 몸도 정상으로 회복이 되어갔다. 몸도 쓰면 쓸수록 소모되는 소모품이라 생각하니까, 병은 신체의 일부고 몸이 아픈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몸에 대한 집착도 많이 놓여졌다. 고장 나면 고쳐 쓰면 되는것이다. 의사는 앞으로 노래 부르기는 힘들 거라고 했지만, 난 지금 동호회 합창단에서 노래하고 있다. 체력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예전에는 밤 10시를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다면, 지금은 새벽 한두 시에 자도 7시면 거뜬히 일어난다.
- 병에 대한 마음을 버려야만 진짜 병에서 벗어날 수 있어 - 2006년, 나는 다시 학교로 복직했다. 주변에 갑상선질환에 걸린 사람들이 많다. 갑상선은 특히 스트레스가 원인이다. 수술을 해서 제거하면 겉으로 보이는 건 없어지지만 ‘있다’라는 마음에 묶여 있는 이상은 그 병에 끌려다니면서 살 수밖에 없다. 그 마음을 버려야지만 그 병에서 진짜 벗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모두 공감을 한다.
마음수련으로 건강도 찾았지만, 정말로 감사한 것은 진짜 나를 찾았다는 것이다. 너무 힘들 땐, 사람은 왜 태어나 이렇게 고통 짐을 받고 살아야 하나, 원망했었다. 그런데 고통과 짐은 내가 만든 나 중심적인 마음들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만 버리면, 나만 버리면, 살아 있는 진짜 존재가 드러나고, 그 모습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꼬마였을 때부터 “너 꿈이 뭐야?” 물으면 항상 “잘 살고 싶어요” 대답했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요!” 당돌하게 말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 마음수련을 하면서 나는 그 꿈을 이루었다. 어찌 보면 갑상선암이라는 그 병이 나를 진짜 삶으로 안내한 것이다.
행복,삶의의미
나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구나 (임재현 / 화성시 남양동)
맞벌이 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자라며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나하나 맞춰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었고 언제까지나 같이 있고픈 분들이었다. 하지만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 부모님은 나를 데려 가기로 결정하셨고, 보호자가 바뀌는 그 경험은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먹는 것 하나, 자는 것 하나 다 바뀌어야 했고, 결정적으로 매우 친밀했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닌 데면데면한 친부모와의 생활 자체가 큰 스트레스였다. 어린아이로서는 세상의 전부가 하루아침에 바뀐 셈이었던 것이다.
- 장래 희망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썼던 아이 -
부모님은 첫아들인 나에게 많은 욕심이 있었다. 특히 교육에 관해서는 다른 아이들에게 뒤처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신나게 놀다가 갑자기 공부를 해야 하고, 친구들보다 점수가 높지 않으면 혼내시는 부모님이 좋을 리 없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부모님을 미워하는 나 자신도 싫었다. 그때부터 근본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주위 환경에 따라 바뀌는 내 마음, 나는 왜 이런 고민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또 이런 고민을 하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가 궁금했다. 그래서인가. 초등학교 6학년 졸업 앨범, 장래 희망을 쓰는 난에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적었다. 주위 애들이 놀렸고 선생님도 장난인 줄 아셨지만, 나는 진심으로 내가 누구인지, 왜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만 하는지가 궁금해서, 제대로 된 사람이 되고 싶어 적었던 거다. 하지만 그냥 그럴 뿐 나의 생활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서, 부모로부터 인정받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열심히 학창시절을 보냈고 또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갔다. 덕분에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행복하지가 않았다. 왜 살아야 하는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지를 않으니 주위에서 원하고 부모가 원하고 나 또한 원하는 줄 알았던 대학에 들어갔음에도 마음은 오히려 허전했던 것이다. ‘이 삶의 끝은 무엇일까?’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뤘음에도 결국 허전한 마음이 가시지 않음은 분명하구나.’ ‘앞으로 더 가지는 삶을 산다 해도 이 마음의 끝은 허무함일 것 같다.’ ‘결국 이 허함은 내 마음 탓이구나.’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그 의문들을 풀 방법도 없었기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학교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미래의 직업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보냈던 것 같다.
- 부모님에 대한 마음 돌아보게 해준 명상 -
새로운 자극이 필요해 늦은 나이에 군 입대를 선택했다. 하지만 2년이 넘는 군대 생활도 크게 소용은 없었다. 좀 더 새로운 자극을 찾아 교환 학생으로 뉴욕대학교에 다니기로 했다. 대학에 다니며 영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영어 학원에 다닐 때였다. 학원 수업 중 ‘연금술사’라는 책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이 있었다. 책 내용은, 보물을 찾아 떠난 주인공이 숱한 고난을 겪으며 여행을 하다 결국 찾던 보물이 집 앞마당에 숨겨져 있음을 알고 찾는다는 내용. 나에게는 그다지 와 닿지도, 마음에 들지도 않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토론 중 어떤 한 분이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안에 있다는 내용이잖아’라고 말하는 순간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같은 책을 읽고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은 메시지를 읽어낼 줄 아는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직관력을 가지게 된 건지 매우 궁금했다. 그는 자신은 명상을 하고 있다면서 소개해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시작된 마음수련을 나는 그렇게 미국에서 하게 된 것이다. 생애 처음 해보는 명상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방법이 좋았음에도 나름 아는 게 많았던 나는 한 과정 한 과정을 따지고 시비하며 힘들게 해나갔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본들, 자기를 돌아보고 마음을 버리게 하는 명확한 방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효과를 경험하는 만큼 꾸준히 해나갈 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도 명상은 계속됐다. 명상을 하면서 성적에 대한 집착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 열등감 등 여러가지 마음들을 돌아보고 버렸지만 역시나 나의 가장 큰 숙제는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었다. 오랫동안 쌓인 마음이어서인지 잘 버려지지도 않고 떠올릴 때마다 원망이 같이 올라와 명상을 하기조차 힘든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었다. 결국에는 부모님에 대한 모든 원망조차 버릴 수 있었다.
- “우리도 부모가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라서였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미워하고, 나에게 잘해주셨던 할아버지 할머니와 끊임없이 비교했던 나. 그 모든 것이 실제가 아닌 철저히 이기적인 입장에서 내 식으로 쌓아둔 가짜마음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버린 순간, 마치 세상에서 처음으로 시원한 공기를 마신 것처럼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그 후 부모님과 대화조차 잘하지 않던 나는 진정으로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부모님을 대하는 내 마음이 바뀌어서일까. 하루는 부모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셨다. “어린 시절에 너를 그렇게 키운 건 우리도 부모가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라서였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건 없다. 하지만 내 식으로 판단하고 쌓아 두었던 마음을 버리는 순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상대도 그 마음을 느끼고 먼저 다가오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부모님과의 관계로 인한 열등감 때문에 항상 뭔가를 채우고자 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마음은 가짜이기에 채울수록 더 부족함을 느끼고 허무해질 뿐이다. 다행히, 어떻게 된 행운인지 나는 마음수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쌓고 더하고 채우는 것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답들은 그렇게 돌아보고 버리는 속에서 하나씩 풀려갔다. 비로소 어린 시절부터 가져왔던 삶의 의문들에 대한 답도 찾고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장래희망,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 소망이 진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허무함도 편협함도 없이, 주위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화해하면서 부드럽고 세련되게 내 삶을 이어간다.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내가 이렇게 행복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참으로 기적 같고 감사하다.
(임재현 님은 1983년 경남 진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포항공과대학 기계과를 졸업했습니다. 어린 시절 환경에 따라 바뀌는 마음을 경험하며 삶과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는 님은, 미국 유학 중 마음수련 명상을 하게 되면서 그 답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현대자동차기술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입니다.)
혼란의 인생에서 즐거운 인생으로(송명근 / 강서구 화곡동)
나는 내가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평범하지만 엇나가지 않는 평탄하고 무난한 삶을 살았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주변엔 항상 나를 좋아해주는 친구들이 있었으며 부모님 걱정도 안 시키는 자식이었던 것 같다. 나름 둥글둥글하고 단순한 성격 덕분에 매순간 고민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가족들이 다 마음수련을 해도, 나는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마음수련은 마음이 힘들거나 소위 도 닦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였기 때문이다.
- 내 삶은 내가 선택해야 한다고? 갑자기 찾아온 혼란 -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무렵 나는 그간의 내 생각과는 다르게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그냥 남들이 하는 대로,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친구들이 좋아해주는 대로 살면 그럭저럭 잘 굴러갔지만, 앞으로의 삶을 위해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시기가 오자 갑자기 큰 혼란에 빠졌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했고, 뭔가 목표를 세워서 내 의지를 갖고 나아가야 했다. 처음 겪는 선택의 과정에서 중심과 자신감을 잃었던 것 같다.
그렇게 무기력한 상황에 빠진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앞가림만 했고, 가끔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로운 영혼을 표방하며 이 시대를 대표하는 청춘인 양 졸업 후의 소중한 몇 년을 허비했다. 그러던 중 날로 심해지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억지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직장에서도 버텨야만 한다는 부담감에 긴장하고 실수를 반복하다보니 동료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날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스트레스만 쌓여가는 지옥 같은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결국 직장생활 한 달 만에 마음수련을 내 발로 찾아갔다. 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명상을 시작한 후 단시간 내에 빠른 효과를 바랐던 나는 마음이 급했다. 매일 지역센터에 가서 4시간 이상 명상을 했다. 나를 괴롭히는 온갖 마음들을 빼기 위해 내 삶을 계속해서 들여다봤다. 처음에는 그저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점점 내 삶을 들여다볼수록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현재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잘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내 인생이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지가 내 과거의 산 삶 속에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나 언니와 동생에게 사랑을 빼앗길까 두려웠던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들었고 칭찬받고 인정받기 위해 행동해왔다. 부모님이 셋 중 누군가를 부르면 제일 먼저 크게 대답을 하고, 쪼르르 달려가서 나에게 무슨 말을 하실지 항상 눈치를 살폈다. 한번은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에 엄마가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으셨는데 저녁 차리시는 것을 도운 일이 있다. 엄마 앞에서 얼쩡거리며 열심히 음식을 나르고 수저를 놓고 하다가 그만 소금 통을 쏟고 말았다. 5살의 내가 그 순간에 처음 했던 행동은 으앙 우는 것이 아니라 빙글빙글 웃으면서 엄마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 것이었다. 한편으론 나에게 실망하셨으면 어떡하지,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 마음 비우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해져 -
그런 어릴 적 한 조각의 기억들은 평생 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게 만들도록 내 안에 다 쌓여 있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선생님이 좋아해주고 인정해줄 행동만 했다. 그렇게 사회에서 말하는 바르고 정직한 삶이라는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저 남들이 시키는 대로 수동적으로 살아왔던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생기자 무너져 버렸다. 나는 그저 남들의 인정과 칭찬만을 먹고 사는 열등감 덩어리였던 것이다.
처음이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자기 객관화가 잘되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나를 객관적으로 본 적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늘 내 안위를 위해 눈치를 보고 착한 척 바른 척 성격 좋은 척했지만 단 한 번도 남을 위한 적은 없는 삶이었다. 스스로를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믿어왔는데 오히려 모든 순간을 최악의 상황으로 세팅해놓고 그 안에서 그나마 최선책을 찾는 긍정적인 척하는 부정덩어리였다. 밑바닥의 그런 내 모습을 보는 것이 정말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나를 직면하고 나니 더 이상 그런 나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내가 진짜 내가 아닌 그냥 사진인, 가짜인 나라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 또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에 희망이 있었다.
실제 마음수련의 매 과정 단계를 올라갈 때마다 가짜인 나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조금씩 알아갔고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마음수련 전 과정을 마치고 난 후, 명상을 하기 이전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나이다.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어떻게 컨트롤하지 못했던 부정적인 무의식의 사진세계를 버리고 나니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또 인생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내고 나니 어떠한 좌절의 조건이 와도 삶이 희망으로 가득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안다. 깜깜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혼란의 인생에서, 언제나 내일이 기대되는 즐거운 인생으로 바뀌었다.
맨 처음 명상을 시작할 때는 나만 행복해지면 돼, 나만 편해지면 돼,라는 마음이었지만 이젠 아니다. 진짜 행복과 자유를 알게 되니 나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마음수련은 너무나 쉬운 방법이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고, 끝까지 할 수 있다. 가짜인 나를 고집하지 않고 방법대로만 따라간다면 누구든지 되는 100프로의 방법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마음수련을 통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기를 깊이 소망한다.
(송명근 님은 1989년 충북 옥천에서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2013년 서울여자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후, 취업 준비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사회로 나가기를 두려워하던 중 삶의 불안감과 존재에 대한 궁금증을 떨칠 수 없어 2015년 4월부터 마음수련을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레코딩 회사에서 다니며,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즐거운 사회생활, 활기차고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스트레스
마음수련원 에서 찾은, 트라우마 극복하는 비법! (장학수 / 소방관)
장학수 소방관. 그가 하는 일은 화재, 교통사고, 산악 사고 등 각종 위급 상황이 발생할 때 출동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직업의 특성상 참혹한 사고 현장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겪는 이른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통받아야만 했다. 마음 빼기를 하며 비로소 그 기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장학수(46) 소방관. “이제 그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각종 사고 현장에서 보게 되는 처참한 광경이에요. 제가 처음 죽음을 접했던 건 교통사고 현장이었죠. 중년 여성의 운구를 이송했었는데 뇌리에 오랫동안 남더라고요. 2005년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따고 본격적으로 응급구조 업무를 하면서 상황은 더했어요. 추락사, 자살, 교통사고 등 각종 사건 사고들을 접하다 보니 어느새 장면 장면이 진하게 각인이 되더라고요. 일하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고 꿈에도 나타나고 가위눌림도 당하고….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과 유사한 현장에 갔을 경우엔 그때 기억이 다시 떠오르니까 참 많이 괴로웠죠. ‘제발 이런 걸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굴뚝같았어요. 정말 이직을 하고 싶을 정도였죠.
그 무렵 우연히 마음수련에 대해 알게 됐어요. ‘진짜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이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거기서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그 방법을 간절히 찾던 중이라 바로 논산 메인센터에 갔습니다.
처음엔 기억을 떠올려 버린다는 게 힘들데요. 특히 죽음과 관련된 사진을 버릴 때는 그 감정 속에 빠져서 허우적대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어디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면서 오기 반 간절함 반으로 버려나가 봤어요. 신기한 건 수련한 지 3일이 지났을 뿐인데, 머리만 대면 바로 잠이 든다는 거예요. 수면 장애가 있어서 잠 한번 자려면 한 시간 이상을 뒤척이면서 실랑이를 벌여야 했거든요. 자다가도 3~4번씩 깨니까 늘 피곤했는데, 잠을 푹 자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제가 바뀌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우선 출동에 대한 두려움들이 조금씩 사라지더라고요.
무엇보다 좋았던 건 나를 괴롭혔던 그 참담한 기억들의 끄달림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늘 회피하고 싶었던 현장에서 사건 사고를 담담하게 처리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놀라기도 하고요. 그렇게 마음의 평온을 찾으니까 하루에 10건 이상씩 사고 처리를 해도 피곤한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그때 진정한 휴식은 마음에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소방관, 경찰관 등은 다른 직종에 비해 외상 후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밝아 보여도 눌러놓고 지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이런 직종의 분들은 특히 마음수련을 했으면 좋겠어요. 집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듯이, 우리의 마음도 한 번쯤 싹 리모델링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힘든 마음들 털어내고, 무거운 기억들을 빼내고 나면 새롭게 편안하게 살 수 있으니까요. 요즘은 출동벨이 울리면 그냥 몸이 뛰어나가지, 어떤 번뇌도 생각도 없어요. “가자! 빨리 가자!” 하고, 오직 내가 필요한 그곳을 향해 힘차게 출동할 뿐입니다.
잘나갔던 프로댄서의 선택 (이항우 / 안산시 상록구)
인순이, 김완선, 민해경, 김건모, 신승훈, 이승철, 현진영… 한때 TV를 통해 매일 볼 수 있었던 인기 가수들, 난 그들 뒤에서 춤을 췄었다. 나는 잘나가는 댄서였고 우리나라 최정상의 댄스 팀을 꾸리고 있었다. 댄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은 다 나를 찾아올 정도였고, 하루 두세 개씩 방송을 소화하느라 바쁜 날들을 보냈다.
- 나를 인정받게 해준 춤 -
춤을 처음 시작한 것은 대학교 축제에서였다. 댄스 참가 모집 포스터를 보고 친구와 찾아간 동아리. 사람 앞에 나서기를 힘들어하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던 내가 춤을 추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처음 출 때는 서툴렀지만 동작이 익숙해질수록 점점 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 당시에는 AFKN이라는 미군방송이 있었다. 거기서 방영하는 쇼 프로그램의 춤을 따라하고 뮤지컬영화 ‘Grease’를 극장 뒤에서 보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따라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그랬나, 주변 친구들이 잘 춘다 잘 춘다 하니 진짜 잘 추게 됐다. 학교 모임이나 축제 때만 되면 어김없이 나의 댄스에 환호와 박수를 보내줬다. 처음으로 뭔가를 잘한다 남에게 인정받자, 남을 즐겁게 해주는 춤의 매력에 더욱 빠졌다.
1980년대는 전 세계가 디스코 열풍에 휩싸여 있던 시절, 우리나라 클럽 여기저기서 디스코 경연대회 붐이 일어났다. 일급호텔과 클럽에서 상금과 상품을 걸고 대회를 개최했고 나가기만 하면 일등은 내 차지였다. 그때 시절 상금이 30만 원 정도면 평사원 봉급 정도이던 시절, 컬러TV, 오디오세트 등 가전제품도 상품으로 받아왔다. 그러던 중 인순이씨 매니저로부터 남자 댄서를 구하는데 해볼 의향이 없냐는 제의가 들어왔고, 그것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본격적인 남자 프로댄서의 시작이 되었다.
- 나를 돌아보게 해준 춤 -
김완선씨도 ‘인순이와 리듬터치’에서 연습생(?) 생활을 할 때 만나, 그녀의 데뷔곡 ‘오늘밤’ ‘리듬 속의 그 춤을’ 안무와 백업을 했다. 이후부터는 여러 가수들의 안무 요청이 쇄도했다. 민해경, 김건모, 신승훈, 이승철 등 KBS ‘젊음의 행진’ 전속 안무도 맡아서 하고 댄스 팀도 50명 정도로 인원이 늘어났다.
춤이 좋아서 하는 일이었지만, 당시 댄스 팀의 환경은 아주 열악했다. 방송 말고 밤업소 활동이나 이벤트 활동 후에는 돈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았다. 댄스 팀원들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해 항상 힘들었다. 댄스에 대한 열정으로 버텼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경쟁하는 댄스 팀도 많아지고, 팀 유지가 힘들어서 10년 넘게 활동하던 댄스계를 떠나게 됐다. 이후 자영업을 하면서 돈도 꽤 모았지만 댄스계 후배들을 만나면 내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 허함을 달래기 위해 술을 자주 마셨고 몸이 점점 축나기 시작했다. 몸 마음이 지쳐 있을 때 조카가 ‘삼촌, 피곤해 보여 좀 쉬다가 와’ 하며 마음수련을 권유했다.
쉬다 올 요량으로 옷가지 몇 개 챙겨서 찾아간 논산 메인센터. 앉아서 명상을 하라는데 내심 ‘어!! 잘못 왔구나’ 싶었다. 난 쉬러 왔는데 눈을 감고 자기를 돌아보란다. 하루가 지나고 ‘그래, 이왕 온 길에 시키는 대로 해보자’ 마음을 바꿔 먹고 시키는 대로, 영화 한편 같은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3일째, 4일째… 나를 돌아보는데… 정말 놀랬다.
- 진짜 행복을 찾게 해준 춤 -
마음을 버리자 나 중심적인 입장에 빠져 있을 땐 잘 몰랐던 내 모습이 정확하게 보인 것이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무시하고 멸시하고, 댄스의 트랜드는 바뀌고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나만 옳다고 고집했던 나. 내가 왜 망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만큼 이기적이고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내 실체를 알고 나니 너무 버리고 싶었다. 마음수련을 하며 한 겹 한 겹 양파 같은 가짜마음들을 빼기하니 나를 옭아매고 붙들고 있던 가짜마음에서 벗어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여행도 많이 다녀봤지만 그때뿐이었다면, 휴식 같은 진짜 휴식을 하게 되어 너무 감사했다. 마음빼기를 하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 수련 전에 먹던 스트레스성 알러지 약을 안 먹어도 될 정도로 좋아졌다.
주말이면 논산메인센터로 전국에서 수백 명이 넘는 분들이 명상을 하러 온다. 나는 그분들에게 자원봉사로 춤을 가르치면서 춤이 서로와 서로의 소통이라는 걸 알게 됐다. 예전에는 나 혼자 인정받고 잘나고 싶은 마음에서 춤을 췄지만 지금은 잘 춘다 못 춘다는 마음이 없이 함께 하나 되서 춤을 추면 즐거움이 극에 달한다. 마음수련을 하면서 천국과 지옥도 내가 만드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가짜마음인 내 마음속에 살면 지옥이고, 진짜마음인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면 천국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진리,깨달음
마음 없이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 (오세천 /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내가 너를 보면 무섭다....."
초등학교 때였다. 육이오 전쟁 중이었지만 소를 몰고 온 들판을 다니며 풀을 먹이고 들어오는 나에게 ,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이후에도 어머니는 종종 '내가 너를 보면 덜컥 겁이 난다'고 하셨다 어린아이가 그 힘든 농사일을 너무 악착같이 하니, 놀랍고 기특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아니 뱃속에 있을 때 지우려고 약까지 먹었는데, 끈질긴 생명력으로 태어난 아이가 누구도 안 하려 하는 힘든 일들을 하니, 안쓰럽고 미안해서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
9남매 중에 일곱 번째로 태어났기에, "내가 너를 지우려고 약을 먹었었다'는 말씀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흘려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잠재의식 깊이에는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게 자리 잡혀서였을까. 생존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커서였을까.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아니 열심히 살아졌다.
삶의 의미 - 내가 사는 것인가, 저절로 살아지는 것인가 -
우리 집은 집터만 400평이 넘는, 여러 소작농까지 둔 부유한 농가였다. 해방 후 바로 내가 8세 때 사회주의가 들어오면서 토지개혁이 일어나 소작농지를 다 분배해야 했지만 우리가 직접 짓는 땅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에 일본 메이지대에서 유학을 할 정도로 식자였던 아버지, 부유한 농가에서 귀하게 자란 형과 누나들은 농사일을 힘들어했다. 그 많은 일들을 힘들다는 생각도 없이 한 것은 나였다. 아직 어리니 일을 안 한들 뭐라 할 사람도 없었건만,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이 저절로 눈이 떠지고 몸이 움직여졌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2~3분 거리에 있는 교회에 가서 종을 치고, 들에 나가 일을 하다가 학교에 가고, 학교에 다녀와서 또 일을 했다. 부지런히 열심히 사는 것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내가 손대는 일은 이상하게 다 잘되고, 내가 하는 농사는 언제나 남들보다 몇 배의 수확을 거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육이오 사변으로 마을에 폭탄이 많이 떨어져 마을 곳곳이 폐허가 되고 고철들이 생겼다. 그게 돈이 될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나는 고철이 보이면 새끼줄로 묶어 집으로 끌고 와서 마당 한쪽에 쌓아놓았다.그것이 중학교 1학년 때의 일, 이후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에는 가격이 많이 올라서 큰 도움이 됐었다.중학교 2학년 때는 당시 특수농작물이었던 담배농사를 지어 고수익을 냈고, 담배농사 이후에는 고구마농사로 전환하여 또 많은 수익을 올렸다. 건강하고 힘이 좋아서 그 무거운 고구마 자루를 혼자 거뜬히 수레에 옮겨 싣고 나가 가게에 팔기도 했다. 중학생이 뭘 알아서 그랬겠는가. 이렇게 하면 돈을 벌 거야 하는, 어떤 계산도 없이 그저 열심히 움직이고 나면 그것이 필요한 등록금이 되고 생활비가 된 것이다.
원하던 대학의 토목학과에도 무난히 들어가고, 그 어렵다는 기술사 시험에도 한번에 합격했다. 이후 건설공무원을 하면서 우수공무원으로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나이 서른에 꾸린 가정도 성공이었다. 중매로 만난 아내는 일본 문화복장학원에 유학 중인 미모의 재원이었다. 결혼 후 아내는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함께 1남 2녀를 키우면서 큰소리 한번 나는 일 없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 아이들 역시 엇나가지 않고 반듯하게 잘 자라주었다.
- 죽음의 경험이 심어준 삶의 지혜 -
한마디로 참 평탄한 삶이었다. 스스로 한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하고자 하는 일에 어떤 장애가 닥쳤다며 좌절한 적도 없으니, 돌아보면 참 신기하고도 이상한 내 인생이었다. 왜 그렇게 살아졌는지 이해된 것은, 나이 육십이 되던 해 지인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면서였다.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라는 존재가 쌓아온 모든 마음을 버리게 하는 마음수련은, 나라는 이기적인 존재를 없어지게 함으로써 편안한 순리의 삶을 살게 하는 명상이었다.
잉태되면서부터 죽음의 공포를 겪어야 했던 생명. 어머니는 그 시대 시골에서 듣고 알았던 아기 지우는 독한 약초를 먹었지만 지워지지 않아, 또 다른 약초를 과하게 먹었다가 아기보다는 당신이 돌아가실 뻔했다고 했다. 갑작기 배가 심하게 아프면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고, 뱃속의 아기가 요동을 쳐오면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몇 차례나 계속돼 죽을 뻔하셨다는 것이다. 그 후 어머니는 많이 후회했고,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다고 했다. 뱃속의 태아에게도 그것은 단순한 죽음의 공포를 넘어 이미 죽음의 목전에 갔던 경험이었으리라..... 죽음에 대한 경험은 또 있었다. 여덟살 무렵 냇가의 물에 빠진 적이 있다. 헤엄도 못 치는데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강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떠올랐다를 반복하면서 500 미터를 떠내려가다가 동네 형이 구해줘 살아났었다. 그렇게 죽음과 직면했던 경험은, 한순간 삶을 내려 놓게 하고, 삶이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잘나 사는 것이 아니라 순리에 의해 저절로 살아지는 것임을, 겸허하게 깨닫게 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쉬지 않고 일하며 학교에 다녔고, 집안의 대소사를 다 챙겼고, 50년 넘게 직접 선산을 관리했던 나다. 사회에 나와서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면서도 소소하게 쓰레기 분리수거, 청소, 설거지까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은 무조건 먼저 했다.
사람이라면 어찌 고생스럽고 힘들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어떻게 그렇게 힘들다, 하기 싫다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는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신기했는데, 그 이치가 마음수련을 만나면서 깨달아진 것이다.
성공 비결- 모두가 하나되어 사는 비결, 자기 마음 버리기 -
가장 아름다운 삶이란 순리의 삶이다.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이 내 뜻과 상관없이 저절로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저절로 사는 자체가 평화고 행복이다.
물이 돌을 만나면 피해 흐르고, 가다가 또 나무 둥치를 만나면 옆으로 흐르듯, 부지런히 움직이되 남들을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살면 저절로 성공하고 잘살게 된다. 아니, 그렇게 산다는 마음 없이 살아진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는 하나다, 마음을 모으자'라며 구호를 외치고 결의를 다지고는 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마음이 다 다르고 보니 그게 참 힘들다. 못 하나 박는 것도, 거울 하나 다는 것도, 이 사람은 이랬으면 좋겠다, 저 사람은 저랬으면 좋겠다 하고 부딪히는 것이 사람 마음이니 말이다. 그것이 해결되는 비결은 딱 하나다. 마음을 비워 자기 마음이 없어지면 저절로 내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상대를 존중하게 되고 하나가 되기에 서로 싸울 일도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마음 비우기를 통해 우리 삶과 마음의 이치까지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 오세천 님은 1939년 경북 김천에서 9남매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부산대학교 토목학과 졸업 후 건설공무원으로 재직했으며 부지런함과 청렴결백을 인정받아 우수공무원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1969년 결혼,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마음수련을 통해 삶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님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마음수련 명상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그 답을 찾다(미하이 미할치욱 / 루마니아 출신, 호주 퍼스 거주)
난 항상 내가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왜 존재하는가,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해답을 얻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것에 관한 질문을 부모님께, 학교 선생님께 그리고 일요일마다 교회 목사님께 했다. 모두들 나름의 답을 해주었지만 그냥 뭔가 아는 척을 하고 있을 뿐 아무도 정말로 답을 알고 있지는 못하다는 게, 어린 나이였지만 너무 명확했던 것 같다.
-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삶의 해답 -
시간이 흐르고 자라면서 이 질문들에 대해 포기하게 되었다. 내 스스로의 인생을 시작하면서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 인생,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자 열심히 파티를 하고 내가 끌어 모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모으자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많은 것들을 사고 또 많은 여자들을 만나도, 겉으로 잘사는 것처럼 보여도, 이런 것들로부터 오는 기쁨이나 즐거움은 잠시뿐이었고 오래가지 못했다. 나의 내면은 공허했고 불완전했고 무언가 채워지지 않았다. 내 마음은 영원한 행복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고, 가능하기는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몇 년 전이다. 부질없는 것들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삶이 너무 짜증이 나고 싫었는데 그와 동시에 내가 어린 시절 가졌던 그 질문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그냥 먹고 배설하는 게 다인가. 좀 더 잘살기 위해 현재는 항상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내가 상대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고 내가 상대보다 더 많은 돈, 더 큰집, 더 비싼 것들을 갖고 있는 것을 잘난 척하고, 그리고 죽는 것. 그게 정말 내가 사는 이유인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에 나섰다. 답을 찾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녔다. 종교로 다시 돌아가 보았고 깨쳤다는 사람들, 무당, 최면술사, 영적 스승이나 치유사라는 사람들을 만나보았고 또 수많은 책을 읽어 보았다. 또 깨침을 얻을 수 있다는 여러 명상도 해보았지만 그 어디서도 해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모든 질문의 답을 찾게 해준 마음수련 그러던 어느 날, 산책을 하던 중 퍼스 명상센터라는 간판을 보고 무작정 들어가 보았다. 짧은 안내 세미나를 받았는데 여기엔 인간마음을 우주마음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고 이 사람들은 그 길을 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가본 많은 곳들이 말만 많고 실제 방법이나 결과가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버리면 스스로 다 안다고 했다. 내가 원한 것은 답을 듣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답 자체를 찾고 싶은 거였기에, 바로 이곳이구나 싶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명상 방법에 따라 수련을 시작했다. 센터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내게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게 아니라 나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내가 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모두들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수련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고 쉬웠으며 난 그 방법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2주 만에 1과정을 마치는 순간 나의 가장 큰 질문이었던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알았다. 정말 기적과 같았다. 부모님은 평생 종교를 갖고 사셨지만 그분들조차 내가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답을 주진 못했다. 전 세계를 여행하고 진리를 찾으려 많은 것을 시도했지만 항상 공허할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 방법이 있었다.
1과정부터 7과정까지 하면서 나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나는 내 좁은 인간마음, 내 삶의 비디오테이프와 그 안에서 나온 수많은 생각 속에 있었기에 미완성이었고 삶은 스트레스와 고통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세상을 내 마음에 맞게 바꾸려다보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버림으로써 본래인 이 무한한 우주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이제 스트레스 대신 행복만 가득 -
이젠 참고향인 나의 본래를 찾았다. 인간 완성을 이루었다. 세상은 완전하고 난 평화롭고 영원한 안정을 찾았다. 삶의 고통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서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과 행복감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그 어떤 돈, 부와 명예도 내가 찾은 이 영원한 삶과 행복을 포기하게 하진 못할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감옥 같았던 인간마음에서 벗어나 영원히 행복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준 마음수련에 너무나 감사하다.
알렉산더 대왕은 칼로 세상을 정복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죽을 때 남긴 세 가지 부탁 중에 하나는 무덤에 갈 때 자기 손이 관 밖으로 보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왜 그런 이상한 부탁을 하는가 묻자 그의 답은 “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와서, 어떤 힘을 갖고 부자였든 유명했든 세상을 떠날 땐 빈손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보기를 바란다”였다. 이제 감사하게도 알렉산더 대왕의 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닌, 이 놀라운 명상 방법을 통해서, 진짜 세상을 가로막는 나의 거짓된 인간마음을 버려 참세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수련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고 쉬우며 누구나 할 수가 있다. 내가 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할 수 있다. 가까운 지역센터를 찾아 시작하길 바란다. 이제는 인간마음에서 벗어나서 우주마음이 되어 우리가 함께 살고 한마음으로, 하나로 사는 때가 온 것이다.
미하이 미할치욱 님은 루마니아의 작은 도시 프레제니에서 5남1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2005년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으며 창문기술자로 일하던 중 어린 시절부터 항상 궁금했던 삶은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책과 명상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많은 곳을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2014년 서부 호주로 이주한 후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마음수련 센터에 다니게 되었으며, 지금은 삶의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감,열등감
훈남 서울대생의 콤플렉스 극복기, 마음수련 명상 효과(박강우 / 대학생)
고3 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살이 쪘다.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조금만 방심을 하면 살이 쪄버리는 체질인데, 그때는 공부에만 신경 쓰다 보니 그렇게 살이 쪄버린 것이다. 이윽고 “너 왜 그렇게 살이 쪘니, 아저씨 같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던 나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고, 외출할 때는 우울증 걸린 사람처럼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녔다.
- 서울대에 들어가도 사라지지 않던 콤플렉스 -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헬스클럽에 다니며 두 달간 20킬로그램 정도의 살을 뺐다. 그럼에도 이전에 가졌던 상처들은 그대로 내 속에 있었다. 다시 살이 찔까 봐 불안해서 매일 아침마다 체중을 쟀고 조금만 몸무게가 늘어도 당장 뛰어나가서 운동을 했다. 더 이상 아저씨 같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콤플렉스는 계속되었다.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를 했기에 합격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주변에 다재다능한 친구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진짜 잘하는 애들 앞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좌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누가 농담으로라도 단점을 얘기하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서 더욱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패션 잡지를 보며 연구하고, 멋진 옷을 찾으러 동대문도 돌아다니고, 신상품을 사는 데 많은 돈을 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지게 세팅이 되지 않으면 집 밖에 나설 수가 없었다. 내 차림 중 어디 한구석만 마음에 안 들어도 짜증이 밀려오고 사람을 만나는 데 자신이 없었다.
- 마음 버려 모두가 하나임 깨닫고 보니, 콤플렉스 따위는 원래 없었던 것- 외모콤플렉스 극복한 서울대 박강우 군2옷을 자주 사도, 언제나 입을 옷은 없었다. 매일 새로운 이미지로 나를 포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대학생 마음수련 캠프에 가게 되었다. 수련을 하며 감추려고만 들었던 나의 콤플렉스를 하나하나 꺼내어 볼 수 있었다. 고3 시절 살이 쪘을 때 사람들에게 들었던 충격의 말들, 나를 무시하는 듯한 사람들의 눈빛, 위축되었던 모습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버려갔다.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고, 한순간 우리 모두의 근원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나로서는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고, 엄청난 변화도 가져왔다. 나 따로 세상 따로일 때는 내가 돋보여야 하기 때문에 힘들었는데, 나라는 틀이 깨지는 순간 나와 세상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고, 모든 게 하나였다. 그 안에 콤플렉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 가짜는 치장하지만 진짜는 꾸미지 않아도 빛나 -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꾸미지 않아도 당당할 수가 있었다. 외모에 대한 강박관념, 다이어트에 대한 부담조차 버리고 나니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스스럼없고 편안했다. 한번은 친구들에게 나에게는 이런 콤플렉스가 있었고, 그걸 감추기 위해 힘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되게 차가운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 냄새가 난다는 둥 하며 공감해주고 편안해했다. 콤플렉스를 드러내면 무시를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 친구는 예전엔 인상이 날카로웠는데, 수련을 하더니 인상이 둥글둥글해지고, 눈빛도 선해졌다고 했다. 마음이 편해지니 인상도 부드럽게 바뀌는구나 싶다. 수련 중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짜는 자기가 가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치장을 해서 드러내려고 하지만, 진짜는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난다고. 허울, 허례허식, 허상의 세계 속에서 살던 나는 콤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는 가짜의 삶을 살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런 가짜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로소 진짜의 세상에서 진짜 내 삶을 사는 기분이다.
상처받은 아이들아, 이제 다른 선택을 해보자(김경미 / 인천법원 소년조사관)
인천법원 소년조사관 김경미씨. 그녀는 학교 폭력, 절도 등으로 법원에 온 청소년들을 미리 조사하고 상담해서, 최종적으로 판사에게 소견서 내는 일을 한다. 2002년부터 이 일을 시작한 그녀는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싶으면 상담이나 정신치료도 받게 하는 등 청소년들을 변화의 길로 이끄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전문조사관이다. 진심으로 아이들을 도와주려면 내 마음부터 긍정적이고 편안해야 하기에 그녀는 매일매일 ‘마음 빼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 아이들 보면 마음 아파 - 얼마 전에 중2 여자애를 만난 적이 있어요. 선생님들한테 욕하고 가출하고 온 아이였어요. 근데 이 아이가 첫 마디부터 욕이더라고요. 말끝마다 욕을 하는데, 도저히 대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안정이 필요할 것 같아, 3주 후 다시 만났어요. 알고 봤더니 상처가 많은 아이였습니다. 부모가 이혼하는 과정에서 매일 싸우는 모습을 봐야 했고, 이혼 후엔 엄마와 살게 됐는데 엄마는 일 때문에 늘 밖에 있고, 왕따도 당하고. 그 과정에서 아이가 터득한 건 ‘이기려면 욕을 하면 된다’였어요. 그래서 위기 상황이다 생각하면 욕부터 나왔던 거죠.
아이에게 “네 사정은 안타깝지만, 잘못했기 때문에 시설로 보내질 거다”라고 하니까 울면서 그래요. “왜 나만 가야 해요. 나를 왕따시켰던 애들, 맨날 싸우던 부모님, 나를 이해 못해준 선생님들, 아무도 안 가는데 왜 나만 가야 해요.” 그렇게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나는 너희 부모도, 널 왕따시켰던 애도, 선생님들도 모른다. 다만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너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너다. 같이 노력하면 분명히 좋아질 거다”라고 했죠.
이곳에 오는 아이들 대부분은 가정 환경이 안 좋아요. 그 아이들에게 세상은 ‘믿을 사람 없고, 두려운 곳’일 뿐이죠. 아마 예전 같았으면 저도 무력감, 슬픔만 느꼈을 것 같아요. 근데 지금은 이렇게 말해줘요. “세상은 좋은 곳이다. 네가 겪은 세계만 그런 것이다. 네가 바뀌면 세상이 얼마나 따듯하고 좋은지 알게 될 거다. 같이 노력해보자.”
- 쉽지 않았던 ‘들어주기’ 그릇의 한계 느껴 - 제가 이렇게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매일매일 마음수련원에 가서 마음빼기를 한 덕분입니다. 사실 상담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치유를 해야 하거든요. 아무래도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사람들과 계속 만나며 영향을 받다 보니까요. 안 그러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힘을 줄 수가 없어요.
쌓인 마음들을 계속 버리고 빼고 하면서, 늘 새로운 에너지로 사람을 대할 수 있게 된 거죠. 아이들을 조사할 때 제일 중요한 건 잘 들어주는 겁니다.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지 않고, 거울처럼 비춰주는 거예요. 그럼 아이들은 이해해주는 것만으로도 환해지고 마음이 열려요. 왜냐하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이해 받지 못하고, 야단만 맞았던 아이들이니까요.
근데 사실 처음에는 들어주는 게 쉽지 않았어요. 사람 만나고 이야기 들어주는 걸 좋아해서 상담을 전공했지만 내 틀이 강하니까,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해도 속으로는 계속 내 잣대로 저건 아닌데, 하며 시비하고 있더라고요. 내 그릇의 한계를 많이 느꼈죠.
- 마음 치료의 최고 방법은 마음빼기 - 그러다 대학원에 다닐 때였는데, 어느 날 정신과 교수님이 굉장히 환해진 얼굴로 오셔서 “마음수련이 어떤 치료보다 마음 치료하는 데 훨씬 더 빠를 것 같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 말에 저도 마음수련을 시작했지요. 마음수련은 한마디로 자기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또 그렇게 쌓아온 마음을 빼주는 곳이더라고요.
수련하며 처음엔 정말 많이 울었어요. 나 자신만 옳다 생각하고, 상대를 내 뜻대로 하려던 자만심과 이기심…. 그런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요. 그러다 마음수련 4과정 때였어요. 진짜 그동안의 나는 없어지면서 주변 모든 것과 하나 된다고 할까. 스쳐가는 바람과 하나고, 날아가는 저 새와 하나고, 주위의 모두와 하나 되는 체험을 했지요.
아, 그렇구나. 모양은 다르게 태어났지만 이렇게, 하나로 살아가는 거구나. 그때 진짜 상담을 하며 느꼈던 모든 고민들이 해결되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감사했어요. 그 무렵 법원에서 조사관 일도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감사했던 건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을, 진심으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는 거예요.
- 모두 하나 된 마음으로 우리 아이들 돌보는 세상 되기를 - 사람은 다 자기가 주체적으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살아온 삶에서 형성된 관념으로 그 관념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잖아요. 특히 아이들은 살아온 삶이 짧다 보니 어른들보다 훨씬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죠. 부모가 싸우고, 왕따 당하고 그런 경험만 한 아이들은 그것이 전부라고 믿는 거예요. 그래서 한순간 잘못된 선택을 한 건데,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 단지 이제부터 바뀔 수 있게 도와주는 거죠.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학교 부적응 학생과 상담하는 소년조사관
“사람은 항상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데, 그동안 너는 너에게,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가 되는 선택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선택을 해보자.”
아이들은 상담을 받게 하거나,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게 하거나, 자기 생을 조금만 돌아보게 해줘도 변합니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행복할 때는, 나중에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전화해서 “아이가 법원 갔다 오더니 눈빛이 확 달라졌다”는 얘기를 하실 때예요. ‘얼어붙은 땅에 봄이 오게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모든 걸 받아주는 사람의 따듯함에는 어떤 마음도 녹기 마련이지요. 청소년 사건의 경우, 판사며 변호사며 진심으로 아이들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 보면 참 고맙죠.
옛날에는 다 ‘우리 애들’이라고 했잖아요. 지나가는 애들도 자기 자식처럼 야단도 쳐주고 칭찬도 해주고요. 그렇게 지금도 ‘자기만 생각하는 마음’ 혹은 ‘내 자식만 잘되면 된다는 마음’ 다 빼고, 모두가 하나 된 마음으로 우리 아이들을 돌보는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런 세상 위해, 저부터 더욱 부지런히 마음 빼기를 하겠습니다.
우울증,불면증
우울증 극복,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 (마리아 트레이시 / 미국 라스베이거스 거주)
( 마리아 트레이시는 슬로바키아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합니다.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미국 생활을 시작했으나,외로움과 우울증으로 힘들었고, 그 마음의 고통은 결혼 생활로도 해결되지 못했다지요.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마음수련을 통해 이겨낼 수 있었다는 마리아 트레이시. 그녀의 솔직 담백한 마음 이야기입니다. )
- '미국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여...' 행복 찾아 떠난 미국행 -
나의 고향은 슬로바키아의 서쪽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마을로, 같은 동네 사람들끼리 시시콜콜한 모르는 게 없는, 그런 곳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슬로바키아의 수도에 있는 한 미국 회사에서 일을 했다. 그 시절 TV에서 미국 쇼를 많이 봤는데 그 속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나도 그렇게 행복해지고 싶었고 나는 뉴욕으로 가 어느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집안일을 해주는 대신 영어를 배우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남겨두고 떠나온 후 나는 외로워지기 시작했고 곧 우울증에 걸렸다. 새로운 친구도 많이 생겼으며 많은 곳을 가봤지만 그 어느 것도 행복하지 않았다. 식구들 생각을 자주 했고 많이 울었다.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남자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 생각하게 되었고 결혼을 했다. 그렇게 해서 이전에 꿈꾸었던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되었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 화가 나도, 슬퍼도, 행복해도 울고... 감정 조절 전혀 안돼 -
남편과 나는 라스베이거스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고 나는 더 우울해졌다.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시작했지만 그 약을 먹자 마치 내가 좀비가 된 느낌이었다. 내가 하는 일에 매우 집착을 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집에는 붙어 있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늘 울었다. 화가 나도, 슬퍼도, 행복해도 울었다. 감정을 전혀 조절할 수가 없었다. 속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 갔다가 마음수련 책자를 보게 되었다. 그 책자는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꽃과 함께 있었고 표지에 '마음수련(Meditation life)'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책자를 집어들고 집에 가지고 왔다. 그전에는 명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는데, 왜 이 명상을 '마음수련'이라고 하는지, 마음 (Mind) 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책을 남편에게 보여주었고 우리는 함께 공개강좌에 참석했다.
- 슬픔, 외로움, 화, 우울증... 점차 사라지게 한 마음수련 -
그 결정이 우리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일단 한 달만 해보기로 하고 별로 마음에 안 들면 안하기로 남편과 결정을 했는데, 두 달, 세 달, 그러다가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고 우리의 삶은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
" 마음수련은 정말 기적이다. 내가 살면서 겪었던 온갖 종류의 슬픔, 외로움, 화, 어두운 느낌, 내 우울증도 포함해서, 점차 점차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어디에서나 나를 따라다니고 내 삶의 매순간을 조종했으나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없어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 돈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스트레스, 이런 것들이 사라졌다. 마음수련을 하기 전에는 무언가를 진정으로 즐긴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어서 겉으로는 행복한 척,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척,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고 있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죽어 있었다. 마음수련은 나에게 영원한 행복과 평화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오랫동안 멀고 낯설게 느껴졌던 남편과 가족들에 대해서도 보다 잘 이해를 하게 되었고 좀 더 따뜻하고 감사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살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해결한다.
- 내가 힘들 때 그랬듯이, 마음수련은 당신을 위해 있는 것 -
내 성격 중에 안 좋은 점 하나는 한 번 화가 나면 며칠씩 간다는 것이다. 남편과 싸우고 나면 며칠, 어떨 때는 일주일씩 말을 안 하곤 했는데 이 버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의 이런 면이 싫었지만 고치는 방법을 몰랐다. 지금은 싸우고 나면 해결법을 금방 알 수 있다. 내 잘못을 더 잘 알게 되었고 더 이상 다른 사람들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가끔 남편이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이야기하지만, 나한텐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요즘 나의 삶은 마치 꽃봉오리들이 만개한 것 같다. 정말 모든 사람들이 마음수련을 했으면 좋겠다. 누구나 살면서 아주 힘든 순간이 있을 것이고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는지 모르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마음수련은, 내게 해주었듯이 당신을 위해 그곳에 있을 것이다.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다 (최심진 / 직장인)
난 거울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서였다. 편안하고 밝고 안정된 얼굴이 아닌 경직되고 화가 난 듯 무서워 보이는 내 얼굴을 거울을 통해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웃을 일이 있을 때마저 활짝 웃지 못하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굳어져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나를 느끼게 될 때는 그것이 너무도 싫고 슬펐다. 마음이 힘들면 얼굴이 새까매져서 아무리 화장을 해도 감출 수 없었다.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을 봐도 산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보다는 그 삶의 무게가 너무도 벅차고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살다가 삶을 마감하고 결국엔 없어지는 게 인생이라면 왜 신은 인간을 만들어서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원망도 많이 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분명 이렇게 살다 가는 게 다는 아닐 텐데, 진정한 행복과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또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건지…. 세상 어디에도 답은 없는 것 같았다. 무엇을 해도 항상 그 끝에 찾아오는 건 알 수 없는 쓸쓸함과 허무함뿐이었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 마음속에 갇힌 만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에게 세상이란 창밖을 통해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대상, 아련하고 멀고 먼 남의 이야기였다.
- 엄마의 힘든 마음 물려주기 싫어 태교로 명상 시작 - “언니, 힘들어 보여. 마음수련 해봐. 해보니까 좋네.”
동생이 마음수련을 권했다. 좋다는 그 말에 끌려서 바로 지역센터에 등록해서 명상을 시작했다. 등록 후 며칠이 지나 임신 사실을 알았다. 유아교육을 공부했던 나는 태교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허무함과 쓸쓸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있는 엄마의 우울함이 뱃속의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아이를 위해서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거였기에 나는 명상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막연히 우울함의 원인이 엄마의 죽음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평생 너무도 힘들게 사신 엄마가 이제 좀 살 만하니까 돌아가셨을 때, 사는 게 뭔가, 세상에 나왔으면 행복하게 잘 살고 끝을 내야 하는데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인생 자체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가정을 가지면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 결혼도 했지만 내가 상상했던 결혼생활은 아니었다. 나와는 너무 다른 남편과의 부딪침 또한 점점 극에 달해 갈 뿐이었다. 이런 게 인생이라면 정말 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마음수련 명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명상을 통해 이 우울함의 원인은 엄마의 죽음 그 이전, 그보다 더 훨씬 이전부터 뿌리 깊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폭력적인 오빠로 인해 불우했던 어린 시절 -
나는 1966년 전라도 광주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아이 셋을 두고 사별하신 아버지가 재혼으로 맞은 두 번째 부인이 나의 엄마다. 아버지의 첫번째 부인은, 오빠를 낳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오빠는 그 충격이 커서인지, 엄마가 없어 마음을 못붙이며 자라서인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 안 가고 걸핏하면 집을 나갔고, 커가면서는 더욱 폭력적이 되었다. 술 먹고 와서 다 때려부수는 건 부지기수였고, 엄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상상을 초월해,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빠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빠가 집에 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조차 제대로 못 쉬었다. 제일 힘들었던 건 엄마가 이 집을 떠나려다가도 당신 자식들 때문에 다시 돌아왔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엄마가 너무도 불쌍하고 그러다가 언젠가는 엄마가 진짜로 사라질까 봐 무서웠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내가 아들인 줄 아셨단다. 오빠가 아들 역할을 못하니 아들을 간절히 바랐다가 낳고 보니 딸이라 실망이 크셨다. 게다가 첫째 언니는 돌 전에 기저귀를 뗐는데 나는 느리고 잘 가리지 못해 야단을 많이 맞았다고 한다. 언니들에 비해 똑똑하고 야무지지 못하다고 비교당하고 야단을 맞아서였을까, 나는 늦게까지 오줌 가리기도 잘 못했다. 밤에 잘 때면 실수할까 봐 겁나고 무서웠고, 자다가는 그 두려움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실례를 했다. 스스로 위축되고 자신감이 없어졌던 것 같다. 한번은 초등학교 가기 전 언니가 공부를 가르쳐줬는데 계속해서 틀리자 그걸 보고 있던 엄마가 심한 말을 했다. 그 순간부터 나 스스로 난 멍청하고 쓸모 없고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린 것 같다. 엄마의 그 부정적인 말들이 바로 내 인생 자체를 지배했다는 것을, 명상을 하며 이해하게 되었다 무엇을 하든 야단맞으면 어떻게 하지,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에 항상 사로잡혀서, 스스로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고 먼저 포기부터 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늘 불안감과 열등감에 휩싸여 있던 나. ‘난 못할 거야’ 하며 늘 위축됐던 내 모습은 그 모든 어린 시절의 기억들로 인해 형성된 나였다.
- 마음 비운 만큼 사라져간 우울과 불안의 뿌리 -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지 못해서 너무도 슬펐던 나, 오빠를 보면 늘 불안하고 무서웠던 마음, 엄마에 대한 원망 그리고 연민. 이 모든 마음들을 열심히 버리고 또 버리고 버렸다. 남들보다 늦어도 좋았다. 남들이 백 걸음 갈 때 나는 한 걸음 가겠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마음수련을 해나갔다. 그 결과 나에게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힘든 마음이 버려질수록 그 마음이 옅어지고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고, 어떻게 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았던 미움과 원망이 떠나고 대신 이해와 미안함이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은 불행하다는 마음에 갇혀 버린 채 그 한과 상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던 오빠. 그때 누구라도 정신적인 치료와 상담을 도와줬더라면 오빠도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사람은 배워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자식 교육을 위해, 매일 서너 시간씩밖에 못 주무실 정도로 생활력이 강하셨던 엄마. 하지만 큰아들 농사를 못 지었다는 죄책감에 늘 시달려야 했었다. 나머지 자식들이 위안이고 자부심이었을 엄마 입장이 되어보니, 그 세월을 지켜주신 엄마가 너무도 고맙고 감사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내가 받고 싶은 걸 주지 않는다고, 엄마한테 또 다른 비수를 꽂으며 살아왔었구나…. 엄마한테 미안했다. 좀 더 노력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열등감 뒤에 숨어 늘 자포자기하고 항상 주변에 바라기만 했던 날들도 떠올랐다.
- 편안해진 엄마 밝게 자란 딸, 마음수련은 최고의 태교 -
결국 나는 어릴 때 사진처럼 찍어 놓은 마음들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그렇게 나만 보호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나만의 마음세계 속에 갇혀 산다는 것이 정말 무서운 것이구나 싶었다.
어떤 마음이든 한 번 그렇게 입력이 되고 나면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 속으로 들어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하지만 그 모든 마음들을 버릴 수만 있다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내 속에 켜켜이 쌓여진 마음들이 깨끗이 비워진다는 것은, 곧 나의 삶이 자유로워지고 행동이 편안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 마음수련을 시작했을 때의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보면 놀랍다고 한다.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하고 사람들하고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나에게서는 옛날의 그 어두웠던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참, 딸아이의 이야기도 해야겠다.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는 자기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가 마음을 비워서인지 참 밝고 씩씩하다. 친구들이나 선생님과의 관계도 좋고 자기 일은 척척 알아서 하니, 마음수련은 정말 최고의 태교이지 않는가.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하지만 자기 마음이 있는 한 행복은 너무나 막연하다. 그 마음이 참으로 내려놓아질 때 찾아지는 것이 진짜 행복이다.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고, 거울 보기를 두렵지 않게 해준 이 마음수련은, 진정한 행복과 자유의 시작이라고.
공황장애,강박증
‘공황장애’가 사라지다(고권호/ KT 네트웍스근무)
직장생활의 과한 업무 스트레스로 공황장애가 왔었다는 고권호 씨.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의사의 말에, 공기 좋은 시골로 가보기도 하고, 마음 수양 관련 책도 많이 읽었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을 만큼 괴로울 때, 동료가 권한 마음수련. 마음빼기만 했을 뿐인데, 공황장애가 밤손님처럼 조용히 사라졌다는 고권호 씨 이야기.
- 일과 사람에 과부하 걸리자, 공황장애 증세 나타나 - 입사 5년 만에 다른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낯선 일에 적응할 틈도 없이 상사의 지시는 쉴새없이 내려왔다. 서류는 끊임없이 쌓여갔고, 현장은 현장대로 바쁘게 돌아갔다. 사람들과도 부딪쳤다. 상사의 지적 한마디는 큰상처가 되었고, 반면 칭찬받는 동료에 대한 열등감은 커져갔다.
‘동료는 예뻐하고, 나는 미워하는구나. 고향도 다르니까 대우를 더 못 받는 거야….’ 동료들의 모습을 확대 해석하며, 스스로를 괴롭혔고, 매사 비굴해져갔다. 내가 자라온 환경도 원망스러웠다. 섬머슴아로 태어나고 자라 대도시에 왔을 때부터 가졌던 열등감이었다. 작은 상처에도 꽁해지고, 대범하게 받아치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의자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불안이 엄습해 왔다. 마치 전깃불이 확하고 켜지듯이 온몸으로 쏟아지는 불안감이었다. 퇴근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지만, 결국 중간에 내려야 했다. 미친듯이 병원을 찾아 헤매었고, 제발로 찾아 들어간 곳은 응급실이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숨쉬기도 힘들고, 발끝과 손끝이 점점 마비되는 듯했다. 이렇게 죽나 보다…. 그렇게 예고탄도 없이 병마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늘어난 업무는 압박감을 주었고 결국엔 과부하가 걸린 거였다.
- 약은 보조일 뿐 마음부터 바꿔 먹으라는 의사, 하지만 어떻게…-
공황장애라 했다. 의사는 약은 보조 역할일 뿐 마음을 바꿔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했지만, 고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늘 긴장 상태이고 심장은 쿵쿵 뛴다. 수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무대에 혼자 서 있는 기분. 긴장 상태가 최고조에 올라가면 과호흡으로 위험해진다. 겨우겨우 호흡 조절을 하면서 위기를 넘겼지만, 언제 닥쳐올지 모를 불안감에 몰골은 수척해갔다.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해 오기도 하고, 24시간 지옥 같은 공포가 이어지기도 했다. 한적한 곳으로 가면 나을까 싶어 시골로 발령을 내봤지만 증상은 여전했다.
업무는 여유 있는데 숨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업무 습관은 그대로였다. 내가 마음이 여리고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보니, 이런 병에 걸렸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책도 보면서 안정을 취하려고 했지만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치 기타줄 당기듯이 뒷골이 당기는 증상까지 겹치면서 죽음의 공포가 연거푸 밀려왔다.
- 소심한 고권호와 함께 조용히 사라져버린 공황장애 -
공황장애 벗어나 행복한 고권호 씨40대에 가장 많다는 ‘돌연사’. 내가 바로 그렇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때 불현듯 동료가 권유했던 마음수련이 떠올랐다. 수련원에 가 죽어라 마음을 버렸다. 마음이 나약해서 이런 병에 걸렸다며 그동안 얼마나 한탄했던가. 그런 마음들을 버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사했다. 처참했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가족들 앞에서 노래도 못 부를 정도로 소심했고, 학급회의 때 말 한마디 못했던 학창시절….
나는 여리다, 소심하다, 하는 기억의 사진들을 떠나보냈다. 이렇게 나약하게 태어나게 했다며 부모님을 원망했던 마음도 버렸다. 나는 평소 사람들한테 잘하는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근데 나의 내면을 살펴보니,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서 나온 행동이었다. 때문에 내 딴엔 잘해주던 상대한데 싫은 소리를 들으면 더 큰 상처가 되었다. 그런 자잘한 상처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더 작아졌다.
결국 그 사진들이 스트레스였다. 부지런히 그 사진을 버려나갔다. 그런 어느 순간이었다. 서류 한 장, 사람들의 말 한마디, 지시사항에 쪼그라들고 상처받던 예전의 ‘고.권.호’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죽어라고 마음 빼기만 했을 뿐인데,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공황장애도 밤손님처럼 언제 간지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졌다. 나에겐 기적 같은 일이었다!
- 세상은 내 마음이 고스란히 펼쳐지는 것, 힘들다면 마음부터 살펴봐야 -
당연히 직장생활도 달라졌다. 사람들과의 부딪침은 줄어들고, 세상을 넓게 보고 수용하는 마음이 커졌다. 일을 할 때도 ‘과연 잘 될까?’ 하며 미리 결과를 걱정하고 초조해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결과는 나오듯이, 이제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 함께하는 동료들이 고맙고, 남을 분별하기보다는 내 역할을 잘하는지부터 점검하게 된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 모두들 직장생활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해온 일만 고수하고 내 모습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다행히도 마음을 버리며 틀에 박혀 있던 고정관념 또한 바꿀 수 있었다. 덕분에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도 생기고, 후배들도 존중하며 스스럼없이 도움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남 앞에서 말도 못하던 내가 어느덧 가족모임이나 동창회모임도 주도한다. 일도 모임도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지만 생활에 치인다는 마음이 없다. 늘 긍정이다. 세상은 나의 마음을 펼쳐서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스트레스로 힘들거나, 안 좋은 일 때문에 괴롭다면 내 마음부터 살펴보길 권유하고 싶다. 자기를 되돌아볼 줄 안다는 것은 곧 새로운 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 애가 ‘과잉행동장애’라구요?(최영미 / 주부)
남편과 다툼이 잦아지자 스트레스는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서적으로 불안해하던 큰아이는 점점 산만해지면서 동생에게도 난폭해졌다. 초등학교에 가서도 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언제부턴가 “친구 없어도 괜찮아, 나 싫어해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손톱이 남아나지 않도록 물어뜯는 게 아닌가. 병원에선 음성 틱 증상이라고 했다.
-‘부모로부터 부정적 영향 받았다니… 미안하다, 아들아’-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도저히 수업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 기복이 심하다며 전문가와의 상담을 권했다. 소아정신과 의사선생님으로부터 과잉행동장애가 있다는 얘길 듣게 되었다. 가정에서 부모와 처음 인간관계를 맺을 당시 늘 부정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긍정적 행동을 잘 모른단다. 그래서 혼날 짓을 해서라도 관심을 받으려고 한다고 했다. 정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 무렵 아는 분이 내게 마음수련을 권했다. 수련을 하며 과거에 받았던 상처와 상처를 줬다고 생각한 마음들을 버리고 버렸다. 특히, 아이에게 잘못했던 모든 것들이 참회가 됐다. 돌아보니 날마다 큰아이를 혼낸 일들만 떠올랐다. 우유를 쏟아서, 어른에게 인사를 안 해서, 글씨를 못 써서, 동생에게 양보를 안 해서, 정말 수많은 이유를 찾아 혼내고 있었다.
아이가 울면서 감정표현을 하려 해도 “울지 마!”라고 윽박지르고 아이의 감정에는 아랑곳없었다.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했던 지난날의 나를 버리자 아이의 행동도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아이를 청소년캠프에 보냈다. 내가 느꼈던 마음의 자유를 아이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 청소년 캠프 다녀온 후, 틱 장애 없어지고 반장 돼 - 아이가 돌아왔을 때 “엄마가 너무 어리석어서 너한테 잘못을 많이 했다. 엄마를 용서해다오” 하자, 아이는 “뭘 그런 얘기를 하냐고, 다 버렸다”고 했다. 항상 또래들 언저리에서 맴돌기만 하던 아이가 친구들과 부대끼며 놀았다. 불안할 때 나오는 음성 틱 증상도 거의 사라졌다. 지난해 학기엔 반장선거에 나가 당선되었다. 집으로 친구를 데려오고, 학교 밴드부에 들어가서 베이스기타도 배우고 있다. 한번은 “엄마, 내가 세상을 너무 재미없게 산 거 같아, 이젠 재밌게 살 거야”라고 해 웃은 적도 있다.
부모들은 대개 아이가 변하길 바란다. 하지만 아이가 변하려면 부모라는 ‘환경’이 먼저 바뀌어야만 한다. 방학이면 엄마들은 아이들을 영어캠프나 해외연수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부모와 아이가 서로 마음을 나누는 일이 아닐까 한다. 마음수련이 그 길을 열어준다.
업무효율,집중력
내가 태어난 이유, 진짜 삶의 의미를 깨닫다(윤진영 / 치과의사)
윤진영씨의 꿈은 ‘자유로운 삶’이었습니다. 커리어우먼이 되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아, 치과의사가 되고 학회 활동과 봉사 활동을 하며 인정도 받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마음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지요. 마음을 버리며 그녀는, 진정한 자유란 성공과 행복, 명예를 좇는, 바로 그 ‘나’가 없을 때 찾아든다는 걸 알게 됩니다. 설렘과 기쁨으로 매일매일 환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그녀의 마음 빼기 이야기입니다.
-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늘 허무해 - 저는 교정 전문 치과의사입니다. 개원을 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저희 병원 곳곳엔 그림이며 인형들이 있습니다. 환자분들이 선물로 주신 거예요. 교정 치료는 대개 2~3년 걸리기 때문에 환자분들과도 가족 같아지지요. 마냥 답답해서 늘 벗어나고 싶었던 이 공간이, 이렇게 소중한 곳이 되었다는 것도 저에겐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딸만 셋인 집안의 장녀로 자랐어요.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다 보니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에다가 장녀로서의 책임감도 있었죠. 근데 현실에 처한 제 모습은 맘에 안 들었습니다. 몸이 약해서 며칠 간 학교에 못 간 적도 많았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어릴 때부터 삶이 참 허무했어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는 게 재미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게 열심히 사는데 난 왜 그러지 못할까? 어떻게 하면 이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을까? 늘 고민이었죠.
- 치과 개원의 행복도 잠시, 점점 커지는 부담감 - 치대에 간 것도 그런 허무함에서 벗어나 좀 현실적으로 살아보고 싶어서였어요. TV에 나오는 커리어우먼처럼 살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근데 치대 공부가 잘 맞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학업 경쟁이 치열해서 애환이 많았죠. 게다가 미래도 제가 꿈꾸는 세상과는 동떨어진 거예요. 하루 종일 조그만 병원에서 있어야 하는 답답함. 넓은 세상을 누비면서 살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니까 힘들었죠.
본과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지도교수님께서 치아 교정을 배워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해주셨어요. 이거다 싶었죠. 저도 어릴 때 치열이 고르지 못해서 잘 웃지 못한 게 콤플렉스였거든요. 제 자신이 환자였고 교정해서 좋아졌으니까, 환자들한테 해드릴 게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학술 교류 세미나라든지 해외에 나가 배울 기회도 많았고, 그 기술을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같은 곳에도 나눠주는 봉사 활동도 했습니다. 실제로 배움에 목말랐기 때문에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은 다 다녔어요. 그러다 2002년 스물아홉에 치과를 개원하였습니다. 치아 교정하면서 어두웠던 환자분 얼굴이 밝아지고, 취업이 잘돼 행복해하시는 걸 보니까 정말 보람 있었어요. 그렇게 2~3년이 지나면서 환자도 점점 많아지고, 해외 활동도 왕성하게 하면서 인정은 받는데도, 이상하게 어깨 위로 짐 덩어리가 짓누르는 것 같은 거예요. 마치 쇠사슬로 칭칭 감긴 느낌이랄까. 항상 마음이 쪼이고 부담스럽고 쫓기는 기분….
- 마음 버릴수록 나를 짓누르던 쇠사슬이 풀려나가는 기분 - 처음엔 병원을 운영하면서 책임지는 게 많아지니까 그러나 보다 했어요. 그렇게 몸 마음이 지쳐갈 때 문득 마음수련이 떠올랐어요. 자기계발 세미나에서 알게 된 분을 통해 우연히 들었거든요. 쉬고 싶은 마음에 동네에 있는 지역수련원에 찾아갔어요.
수련을 하며 돌아보니 하루 24시간을 바쁘게 안 살면 도태되고, 큰일 나는 줄 알았더라고요.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 해외 활동을 많이 하려면 체력도 좋고 언어도 잘해야 하는데, 몸이 약해서 못 따라가니까 몸이 망가지고 있었어요. 그동안 얼마나 몸을 혹사시켰는지 수련할 때는 온몸이 몸살 난 것처럼 아프더라고요.
근데 계속 수련을 하다 보니 힘든 기억들이 아련해지면서 몸도 편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이건 정말 해야 하는 거구나, 이거 아니면 인생의 해답을 풀 방법이 없겠구나 싶어 더 열심히 수련했죠. 그랬더니 어느 순간부터 너무 편안해지면서 신기하게도 나를 짓누르던 쇠사슬이 풀려나가는 느낌이었어요.
- ‘나’가 없으면 세상 자체가 자유임을 깨달아 - 저는 정말 자유롭게 살고 싶었거든요. 근데 우주 입장에서 살아온 삶을 돌아보니 그동안 ‘나’란 좁은 의식에 갇혀 그 안에서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더라고요. 나는 행복해야 하고, 자유로워야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인정받아야 한다면서. 바로 그 ‘나’가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는 것, 그 나가 없으면 나 자체가 세상이고, 세상 자체가 자유라는 걸 마음을 버리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전엔 원하는 것 사고, 가고 싶은 데 가는 게 자유인 줄 알았는데, 진정한 자유란 내가 없을 때 있는 거였어요. 그 후부터는 병원에서 하루 종일 환자를 대해도 마음속 깊이 자유와 행복이 샘솟았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나’라고 생각해온 나의 마음들. 자존심, 명예, 욕심 등을 하나씩 버릴수록 느껴지는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어요. 사실 의사라는 직업이 스트레스가 많아요.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다 환자들의 기대치도 있으니까요. 또한 항시 응급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데다, 수많은 병원들과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습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 한편으로, ‘난 의사다’ 하는 잘난 마음도 있다 보니, 환자에게 겉으론 친절해도 스스로 불편함이 있었어요.
-‘나’를 구속하던 그 ‘나’를 버리고 찾은 진짜 행복 - 그런 마음을 버린 만큼 분별이나 가식이 없어지니까, 환자의 고충을 잘 듣고 도와드리게 되고, 말 한마디도 따듯하게 해드리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환자분들이 입소문으로 찾아오시거나 다른 병원에서 추천해주셔서 오시기도 해요. 이렇게 지금처럼 내가 머무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세상과 교류하고 나누며 살면 되는 거였는데 항상 먼 곳만 보고 살았구나….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기분입니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누구나 있잖아요. 진짜 삶의 의미를 알고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아는 게 사람의 도리인데, 그걸 모르고 사니까 참 힘들고 괴로웠더라고요. 그 도리를 알고 나니까 상식적으로 사는 게 뭔지를 알게 되고, 살아가는 게 자연스러워지는 거 같아요. 남보다 잘나가는 게 행복이 아니라, 그냥 지금 내 옆에 있는 형제, 이웃끼리 따듯한 밥, 따듯한 체온을 나누고 살면 되는 거였는데, 그런 소소한 행복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 이제 진짜 의사가 된 기분입니다. 처음 개원해 설레는 맘으로 환자를 보고 좋아지는 모습에 진심으로 기뻐했던, 그 초심을 비로소 되찾게 된 거죠.
좋은 음악 위해 꼭 해야 할 일, 명상 그리고 마음수련(신지혜 / 오보에 연주자)
신지혜씨는 촉망받는 실력파 오보에 연주자다. 독일에서 유학 후 한국으로 돌아와 여러 오케스트라의 객원 수석 및 실내악 연주에 참여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과 경북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시절의 지도교수 이윤정(현 경희대 교수)씨는 그녀에 대해 “음악성이 뛰어나다. 무엇보다 뛰어난 건 늘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흔들리는 게 없다는 것이다”라고 평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이 그렇게 한결같을 수 있었던 것은 진정으로 마음을 비우는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끊임 없는 경쟁의 연속, 행복한 적 없던 음악 인생 - 오보에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할 때 첫 음을 맞추는 역할을 해요. 연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오보에가 ‘라’ 음을 불면 거기에 맞춰, 다른 악기들이 음을 맞춰요. ‘라’ 음을 부는 소리만 들어도 그 오보에 주자가 얼마나 잘하는지 알 수 있어요. 오보에의 음이 잘못되면 악단 모두가 틀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엄청 긴장하게 되지요. 사실 음악 인생이라는 게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지만 끊임없는 경쟁의 연속입니다. 입시 경쟁, 끊임없는 시험, 오디션….ms.shin-oboe-player-controling-mind (2)
저는 어릴 적부터 항상 음악과 함께해 왔어요. 어머니가 피아노를 전공하셨기 때문에 집 안에서는 항상 피아노 소리에, 집 밖에서는 오케스트라 연주, 악기별 독주 등 클래식 연주회를 많이 데리고 다니셨죠. 이런 환경에서 어머니는 당연히 딸도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처음에는 피아노, 그 다음에는 첼로 다 해보다가 중학교 때 오보에를 시작했어요. 소리가 달콤하다고 해야 하나, 사람 마음을 흔든다고 해야 하나, 그런 점들이 제게 다가왔지요. 연습할 때는 힘들어도 무대에 서서 연주할 때의 성취감, 박수 받고 주목받는 것들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행복했던 적은 별로 없었어요. 지기 싫어하고 예민한 성격이라 더 스트레스를 받았죠. 그래서 항상 체기가 없던 적이 없었어요. 오보에는 부는 악기라 호흡이 다 느껴지고, 내 마음이 안 좋으면 더 티가 나요. 그래서 지도교수님도 오보에를 연주하기 위해선, 한결같은 평상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 하셨는데 그러기가 쉽지는 않더라고요.
- 평상심 유지하고 싶어 독일 유학 중에도 마음수련 계속 - 그랬던 저에게 변화의 계기가 됐던 게 대학교 2학년 때 시작한 마음수련이었어요. 처음엔 한 일주일만 해볼 생각이었는데, 막상 마음을 비워보니까 정말 편안하고 좋더라고요. 그래서 계속하게 되었는데, 마음을 비우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죠. 항상 체하던 것도 없어지고, 쓸데없는 스트레스나 걱정들도 사라지고. 그러다 보니까 점점 연주 실력도 늘고요.
그러다 2007년에 독일 만하임국립음악대학교로 유학 갔을 때였어요. 주눅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한국에선 잘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낯선 환경에 언어도 안되고 여러 가지로 힘들 때, 가장 위안이 되었던 곳이 프랑스에 있는 파리 마음수련원이었습니다. 지금은 독일 베를린에도 수련원이 있지만 제가 만하임음대 다녔을 적에는 제가 있는 도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파리 수련원이었어요. 에펠탑 근처에 있는 수련원인데, 기차 타고 3시간 거리였어요. 그곳에는 한국어 교수님, 직장인, 유학생들 등 수련생들이 많았습니다. 다들 마음을 빼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니 당연히 분위기도 좋았지요. 언제든 가면 맛있는 것도 해주시고 늘 힘을 주시고 수련도 도와주셨어요. 덕분에 힘들고 걸리는 것, 마음에 쌓인 것들, 나의 틀을 버리면서 낯선 환경에 도전할 용기도 생겼고 적극적으로 유학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수련을 하며 정말 제가 마음에 아주 큰 것을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오보에였어요. 오보에가 없는 나는 상상할 수도 없고, 사람들한테 항상 자신감 있는 모습도 오보에를 하고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좋아해주는 것도 오보에 때문이고…. 그 엄청난 집착이 저를 구속하고 있더라고요. 오보에가 나 자체이니, 인정받기 위해 더 잘해야 하고, 못할까 봐 긴장하고, 불안해하고, 못하면 괴롭고…. 좋아서가 아니라 불안해서 계속하고 있었던 거예요. 오보에를 안 하면 남들로부터 무시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 음악, 명예, 사랑… 다 내려놓았을 때 진짜 음악 즐길 수 있어 - 진심으로 오보에를 놓아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치열하게 몇 날 며칠을 버렸지요. 그리고 마음에서 탁 놔지는 순간의 해방감이란… 그게 바로 자유더라고요. 음악, 명예, 사랑… 그런 것들을 다 버리고 비웠을 때, 진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지요. 버리면 다 없어지는 것 같지만 세상은 더 큰 걸 주더라고요. 그렇게 크게 한번 나를 넘어서고 나서야 음악을 진짜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무대에서 연주하는 게 180도 달라졌어요. 악기를 하는 그 시간 자체가 너무 소중해지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게 되더라고요.
같은 악보인데도 예전에는 안 보였던 것들도 보였지요. 이 음악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는 아이디어도 계속 나오고요. 그동안 신지혜라는 좁은 마음세계에서 연주했다면,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나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게 되었으니까요. 연주할 때 예전엔 나 잘하는지 한번 봐줄래? 그런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사람들의 평가에 집착하지 않으니까 몰입도 잘되고 물 흐르듯 연주도 흘러갔습니다.
친구들도 편안해졌다고, 얼굴부터 달라졌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수련을 하면 가장 많이 생기는 것 중의 하나가 집중력이에요.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념들이 없어지니까, 하고 싶은 만큼 마음먹은 만큼 최대한 능력을 다 펼칠 수가 있습니다. 진짜 아무것도 없어야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다는 말을 많이 실감하게 됩니다.
특히 음악인들에겐 마음을 다스리는 게 중요한 거 같습니다. 주위에 보면 긴장감에 안정제를 안 먹으면 무대에 못 서는 연주자들도 많아요. 음악가들은 음악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잖아요. 좋은 음악을 위해서라도 꼭 한번 자신을 내려놓는 시간, 비워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음악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행복을 주잖아요. 저도 마음 없는 진짜 음악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합니다. 제 음악을 듣고 ‘행복했다’ 하시는 분들이 아주아주 많아질 날을 꿈꿉니다.
대인관계
처세술 책 백 권보다 나은 대인관계 노하우(장혜정 / 컴퓨터 프로그래머)
("혜정씨는 인기가 많아서 좋겠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 같애."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는구나 느끼게 되었다. 전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사람은 내가 노력을 해야만 오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도적인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순간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나로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 부담스러운 숙제 같았던 인간관계 -
그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마음수련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남자친구며 여러 인간관계가 생각처럼 되지 않아 힘들 때 마음수련을 하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을까? 20대 후반경에는 아예 그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회사생활 잘하는 방법, 상사한테 인정받는 방법 등등.... 그런 책들에서는 기술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화할 땐 얼마 만에 한 번씩 맞장구를 쳐줘라, 생일을 기억해 놨다가 카드를 보내라 등등의 지침을 챙기기 위해 더 분주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인간관계가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예전엔 사람들 사이엔 의무 같은 게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라면, 선배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런 기준을 까다롭게 적용시키다 보니 상대도 부담스러워했다. 누구와도 안전된 관계는 이어지질 않았고, 나는 조급했다. 인간관계란 내가 뭔가를 끊임없이 해야 유지되는 부담스런 숙제 같았다.
- 인간관계 잘하는 방법, 그 열쇠를 찾다 -
수련을 하면서 내가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어떤 요령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인지도 알았다. 모든 인연은 다 순리대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인데, 모두 다 내 기준에 맞추려고 억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주위 사람들도 변화된 나에 대해 호감과 신뢰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마음수련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알게 됐다. 상대에 대한 마음이 없으면 된다. 상대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없고,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내 입장에서 시시비비를 안 하면 정말 편안하게 대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을 못하고 산다.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려주기가 어렵다. 처세술 100권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간단한 일, 인간관계를 여는 간단한 열쇠 하나가 내 입장을 버리고 세상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나를 버리면 누구에게나 맞는 만능 열쇠가 되어버린다.
마음수련 교원직무연수 후 변화된 대인관계 (강윤숙 / 교사)
-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았던 나 -
나 혼자만 잘나, 친구들도 무시했었다. 그래서인지 친구가 많지 않았다. 친구들도 착한 얼굴로 앉아 속으로는 자신을 무시하던 나의 마음을 알았나 보다. 사실 자라면서 어른들에게 칭찬받고, 선생님께 칭찬받고, 부모님에게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던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줄 알았다.
대학 때도 친구들보다 더 인생을 깊이 있게 살고 있고, 진실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중학교 선생님이 되어서도 그랬다. 다른 선생님들은 내가 생각하는 ‘바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더욱 나와 성향이 다른 선생님들과 마찰이 많았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항상 그분들은 불편해했고, 서로 불만이 많다는 걸 느꼈다. 학생들이 내 진실된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원망스러웠다.
항상 잘났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던 나였기에 결혼생활도 무척 힘들었다. 나에게 부조리한 많은 걸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어머니와 나와 진실된 삶을, 평등한 삶을 살자고 약속했던 남편이 그 언저리에 가지도, 가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여 짜증 났다. 짜증은 우리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어느 날 “엄마, 나에게 소리 지르지 마. 무서워!”라고 큰딸이 하소연했다.
- 마음 버리자 비로소 보인 남편, 시어머니의 원래 모습 -
동료 교사의 소개로 마음수련 교원직무연수를 했다. 여러 날, 내 인생,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깊은 반성의 눈물을 흘렸다. 내 마음과 씨름하면서, 그 마음들을 하나씩 하나씩 버려나갔다. 그러면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 가족, 남편, 딸들, 시댁 식구들, 친구들, 학생들, 선생님들에게 정말 ‘잘못했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마음수련 교원직무연수를 한 후 사람들과의 부딪침이 점점 줄었다. 매일 저녁, 그날의 나를 돌아보면서 마음을 버렸다. 지금은 매 순간 그 마음들을 버린다. 어느 사이엔가 산다는 것이, 인생이 너무나 즐겁고 기뻤다. 집에서 가족들과 있으면 가족들과 있어서 행복하고 좋다. 학교에 오면 학생들과 선생님들과 얘기하고 떠들며 하루가 즐겁다.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들었나 생각해 봤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에 대한 ‘바람’이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학생들에게, 주위 선생님들에게 바라는 것이 많았다. 다 내 입장에서 좋은 것,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버리고 본 남편은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입장보다 나를 더 생각해 주는 정말 ‘착한 남편’이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고생하지 않도록 자신이 대부분을 희생하시는 헌신적인 분이셨다. 아이들은 내 인생의 행복함을 같이 즐기라고 하늘이 보내준 동락자(同樂者)였다. 더 이상 내가 옳은 것을 교육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 내가 달라진 걸까? 아이들이 달라진 걸까? -
예전엔 학년 부장님과 자주 부딪쳤다. 교육적이지 않은 많은 것들을 나에게 강요한다고 여겼다. 주위 선생님들도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가 없이 불편했다. 지금 나는 학교에서 만나는 모든 선생님들의 팬이다. 참 열심히 살며 교육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럽다. 그 선생님들과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지내는 시간이 마냥 즐겁다.
중학교 1학년 아침 독서시간. 책을 읽다가 아이들을 바라봤다. 이 아이들은 참으로 마음을 잘 연다. 내가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면 나를 향해 마음을 활짝 열고 기다린다. 그리고는 곧 나와 친구가 된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워주길 바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예전에 나는 학생의 장점보다 단점을 훨씬 많이 알고 있는 교사였다. 내 교실에는 장점이라고는 눈 씻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학생들만 있었다. 내가 달라진 걸까, 학생들이 달라진 걸까. 답은 너무나 분명했다.
난 지금 단점보다 장점을 훨씬 많이 가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이렇게 많은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게 됐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원래부터 아름다운 인연으로 내 옆에 있었다. 그것을 알게 해준 마음수련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