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관리자, 승인된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분류:명상 단체]] ==개요== <br> [[파일:위빠.png]]<br> (출처 : freepik)<br> '''위빠사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위(Vi)'라는 단어와 '빠사나(Passana)란 두 개의 단어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이다. <br> '''위(Vi)는 '모든 것', '다양한', '전부'란 뜻'''이고, '''빠사나(Passana)는 '꿰뚫어 보다', '똑바로 알다'라는 뜻'''으로 <br> '위빠사나'란 ''''모든 것을 이해하고 꿰뜷어 본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br> <br> ==정의== 위빠사나는 세간의 진실한 모습을 본다. 혹은 분석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br> 여기서 분석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편견(혹은 욕구)을 개입시키지 않고 현상을 현상 자체로 본다는 뜻이다. <br> 즉 어느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고요한 상태를 얻은 후에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 소멸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수행을 말한다. <br> 이것은 붓다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수행법으로서 초기 불교부터 매우 중요시 되어왔다. <br> <br> 현재에는 주로 실론, 버어마 등 소위 남방불교의 승려들과 재가 신자들에 의해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br>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붓다의 수행법을 보존하고 발전시켜왔다는 그들의 자부심은 자못 대단하다. <br> 한국과 일본 등 화두를 가지고 참선 수행을 주로 하는 대승불교 국가에서는 이것을 소승의 수행법이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붓다의 수행 방법을 소승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br> <br> ==특성== '''위빠사나 수행의 특성은 우선 현재적 성격'''에 있다. <br> 예컨대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는 경우, 호흡이야말로 현재의 순간 순간에 명멸하고 있는 가장 현재적 사건이다. <br> 이미 지나간 호흡이나 미래에 하게 될 호흡은 결코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호흡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바로 지금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정이 되는 것이다. <br> 초기 불교에서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예컨대 자아나 유일신 같은) 대상에 대한 탐구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있다. <br> 현존재가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을 벗기 위해 필요한 것은 괴로움의 원인이자 그 구조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br> 그렇기 때문에 '''명상의 대상은 반드시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br>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관찰하여 일체의 사물이 무상하고, 무아이며, 따라서 괴로움이라는 것을 직관해내는 것이 이 수행의 핵심이다. <br> 이때, 직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인지이다. <br>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위빠사나의 대상은 몸, 감각, 마음, 생각의 대상 등 네가지이다. <br> 그 어떤 경우에도 현재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현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붓다가 가르친 바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br> <br> 위빠사나 수행법의 '''장점은 우선 일상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br> 모든 언어 동작이 수행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br> 구체적으로는 어떤 현상에건 반드시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한다. <br> 무슨 걱정거리가 생각나면 그 걱정거리에만 마음을 집중한다. <br> 망상이 떠오르면 망상에 집중하고 기특한 생각이 나면 기특한 생각에 마음을 모은다. <br> 좋은 것이든 궂은 것이든 영속하는 것은 없고 끊임없이 찰나마다 생성, 소멸하는 현상이 있을 뿐이다. <br> 그러다가 걷거나 눕거나 무엇을 잡거나 어떤 동작을 취하게 되면 그 동작의 극히 미세한 부분까지 자각할 수 있게 마음을 집중한다. <br>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일상생활을 깨어 있는 정신으로 영위하면서 할 수 있는 수행이 위빠사나이다. <br>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영원한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에 간단없이 마음을 모아 삼매가 굳고 깊어지면, 더욱 미세한 생성과 소멸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응축력이 강화되어 일순간에 깨달음을 얻을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 의의 == 위빠사나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느낌을 주는 이 명칭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이다. <br> 많은 한국인 수행자들이 미얀마 등 남방의 불교 국가에 건너가 이것을 배워 왔고, 자신들의 수행 체험을 주변에 알리는 가운데 위빠사나라는 명칭을 각인시켰다. 이 명상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제반 현상을 그때그때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초기 경전에 나타나는 사념처 수행을 실제적인 내용으로 한다. <br> <br> 동북아시아의 대승불교권에서는 이 방법이 간화선이라는 독자적인 수행법에 가려져 잠시 망각되었다. <br> 그러나 남아시아의 상좌부 불교권에서는 이것을 붓다가 직접 개발하고 유포한 명상으로 믿으며 계승해 오고 있다. <br> 대승불교의 영향 아래에 있는 한국에서 위빠사나는 이질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 <br> 그러나 이것은 초기불교 이래의 전통적인 명상 기법을 가리킨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br> <br> 위빠사나로 대변되는 붓다의 가르침은 오로지 있는 그대로만을 관찰, 자각케 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br> 이것을 통해 우리는 제반 현상을 사실대로 수용하고 통찰하게 되며 종국에 이르러서는 그것의 참된 모습을 깨닫게 된다. <br> 궁극의 목표로 제시되는 열반의 경지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br> 성숙된 위빠사나를 통해 우리는 편견과 왜곡으로부터 벗어난 투명한 눈으로 사물의 참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br> 즉 내면의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br> 따라서 위빠사나는 '탐냄, 성냄, 어리석음의 소멸'로 정의되는 열반의 경지와 그대로 통해 있다.<br> == 역사 == 현상 통찰하는 남방 수행법 '''불교는 깨침과 닦음의 종교'''이다. <br> 2500년전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새벽별을 보고 이룬 부처님의 큰 깨침은 불교의 처음이요 끝이다. <br> 그 깨친 바 진리를 풀어놓은 것이 불교의 모든 것이며, 그것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깨침에 돌아가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br> 이러한 깨침의 종교인 불교는 단순한 이론이나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깨침을 향한 실천 즉, 닦음을 요청한다. <br> 따라서 진정한 불교인은 쉼 없는 닦음을 통해 날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아니된다. <br> 불교의 닦음은 어떠한 것일까? 불교의 닦음은 본질적으로 스스로 닦는 닦음이다. <br> 모든 사람은 스스로의 실천과 노력을 통하여 깨침에 이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br> 돌아가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너 자신을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아 열심히 정진하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당부도 <br>이러한 불교적 실천, 닦음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이러한 불교적 닦음의 구체적 내용이 그 유명한 '여덟 가지 바른 실천', 즉 팔정도 ( 八正道 ) 이다. <br> '''일체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열반 ( 涅槃 : nirvāṇa 니르바나 )''' 에 이르기 위하여 <br>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정진, 바른 관찰, 바른 선정 ' 의 여덟 가지 실천이 필요한다는 것이다. <br> 이 여덟 가지 바른 실천이야말로 모든 불교적 실천의 원형이다. <br> 마음 공부를 기본으로 하는 선 또한 그 연원을 이 가운데서 찾지 않으면 아니 된다. <br> 팔정도 가운데서 특히 마음 닦는 선법의 기본이 되는 실천은 바른 관찰, 바른 선정 즉 정념과 정정의 두 가지이다. <br> 정정은 마음을 하나되게 하는 삼매의 훈련이며 정념은 마음을 밝게 하여 비추어 보는 것이다. <br> 즉, 지관이라고 할때는 정정,관은 정념을 가리킨다. <br> <br> 대승불교, 특히 중국에서 발달된 '''선 역시 그 뿌리를 정념과 정정의 실천에서 찾지 않으면 아니 된다.''' <br> 그러한 근본불교의 실천이 발달, 변형된 것이기 때문이다. <br> 위빠사나의 선의 성격 위빠사나 선은 어떠한 실천인가? <br> 위빠사나란 관(觀)밝게 본다는 뜻으로 념(念,Sati)과 통하는 말이다. <br> 따라서 위빠사나 선은 '''정념의 실천'''을 가르킨다. <br> 정념은 우리 나라에서 팔정도의 다른 실천인 정사와 혼동되고 있지만, 행동하기 전의 사유를 가르키는 정사와는 전혀 다르다. <br> 정념의 념, 즉 관은 '''마음이 밝게 비추어 봄'''을 말한다. <br> 영어로는 mindful하다 aware한다는 상태로 표현되고 있다. <br> 따라서 위빠사나의 봄은 순일한 그저 봄을 가리킨다고나 할까. <br> 이 실천법은 부처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마음공부로 지금까지 남방불교의 여러 나라에 전승되고 있으며 근래에는 미국을 위시한 서양에도 보급되어 널리 실천되고 있다. == 호흡 == 인도의 요가와 중국의 단전호흡에서는 '''호흡을 매우 중요시'''한다. <br> 우파니샤드 이래 인도의 모든 종교에서는 깨달음의 수단으로 요가를 주장하며, 석가모니가 수식법을 했다는 것도, 요가명상을 한 것이다. <br> 고대 인도인들은 숨인 '프라나 (prana : 힌두 철학에서 모든 생명체를 존재하게 하는 힘)'를 생명의 기운, 생명 그 자체, 우주의 근본 원리라고 보았다. <br> 리그베다의 '푸루샤 수크타'라는 찬가에는 푸루샤의 숨으로부터 바람이 생겼다고 한다. <br> 우파니샤드에서는 숨을 우주의 원리인 브라흐마와 아트만이라고 했다. <br> 아티르바 베다에는 숨이 세상의 지배자, 여신이라며 찬양하는 시가 있다. <br> 이렇게 '''호흡을 절대시하는 사상적 전통은 인도만이 아니라 인도와 접경한 중국의 도교에서도 마찬가지'''로서, 단전호흡을 하면 신선이 되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한다. <br> 이렇게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은 다양한 수행 전통에 존재한다. <br> 하지만 부처님은 수식관 혹은 아나빠나사띠 그 자체에서 얻은 선정력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판단, 세상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를 최초로 시도하셨다. <br> 그런데 일반적으로 '''지혜를 기르는 위빠사나 수행에는 사마타의 선정력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br> 아주 특이하게 호흡수행 즉 선정수행 없이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br> 결국 불교 수행은 계행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호흡수행 등 사마타 수행으로 선정을 닦은 후, 그 선정력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나와 세상에 대한 무명과 갈애를 타파하여 번뇌를 소멸하고 열반에 이르는 지혜를 기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다. <br> 즉 불교수행에서 호흡이란 지혜의 기반이 되는 선정을 기르기 위한 선정수행의 대상이 된다. <br> 다른 종교에도 호흡수행은 존재한다. <br> 하지만 불교의 호흡수행을 통한 선정과 다른 종교의 호흡수행을 통한 선정은 다르다. <br> 다른 종교의 호흡수행은 수행을 통한 고요함과 선정에 끝난다. <br> <br> 반면에 불교의 호흡수행은 '''수행을 통해 얻은 고요함과 선정력이 갈애와 무명을 타자하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지혜로 전환되는 위빠사나 수행'''과 연결되는 정견의 매커니즘속에서 이루어진다. <br> 그리고 이 전체 수행 매커니즘은 철저하게 불교의 정견에 기반을 두고 행해진다. <br> 그래서 불교에서는 바른 삼매( 정견을 바탕에 둔 삼매 )와 삿된 삼매( 정견을 바탕으로 두지 않은 삼매 )로 호흡수행이나 기타 사마타 수행을 통한 삼매를 구분한다. == 수행 방법 == 위빠사나는 크게 '''두가지 수행법이 있는데, 좌선과 경행 (행선)''' 이다. <br><br> * '''좌선은 가부좌 상태로 앉아서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다.''' <br> 즉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수행인데 일어남 ( 숨을 들이쉬어 배가 나올 때 ) 과 사라짐 ( 숨을 내뱉어 배가 들어갈 때 ) 를 관찰한다. <br>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온갖 잡념이 생기고 쑤셔 오는 부위에 집중한다. 잡념이나 아픔의 대상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아픔이나 잡념이 사라진다. 이렇게 1시간 정도 좌선을 하고 다시 1시간 정도 경행 ( 행선 ) 을 반복한다. * '''경행은 좌선으로 굳어지거나 뭉쳐진 근육을 풀어 주는 수행법으로, 발바닥에 집중하는 것이다.''' <br> 편하게 서서 손은 앞으로 모으거나 편하게 뒷짐을 진다. 전방을 보며 천천히 걸어가면서 발바닥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br> 발을 들 때, '듦, 나아감, 놓음' 세 단계에 집중하면서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위빠사나 문서로 돌아갑니다.